명인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위원장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이하 전남센터)는 해마다 40시간 가량의 겨울공부, 15시간 정도의 여름공부를 한다. 이때 지난 학기 수업을 하며 제기된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학습을 함께 하며 다음 학기 교안을 고민하고, 학기마다 공통의 수업 목표를 담은 공통 교안으로 수업을 준비한다. 올해는 전남 지역의 중학교 3학년 전체로 교육이 확대되어 이번 학기에는 이미 특성화고 수업을 진행하는 와중에 전 강사가 돌아가면서 시연을 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는 시연 대장정을 아직 진행 중이다. 이런 식의 수업 준비가 5년째다 보니 강사들이 함께해 온 연차나 참여 정도에 따라 올해는 특히 성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강사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전반적으로 강사들의 자발적인 학습 욕구가 매우 높아졌다. 그럼에도 내가 첫해부터 지금까지 우리 강사들에게 5년째 반복하는 질문이 있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 강사들에게 묻는다. “샘이 사회 문제에 눈을 뜨고 계급적 각성을 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셨나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전남센터의 강사들은 열이면 열, 모두 10년 안팎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내가 묻는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만나는 학생들은 단 두 시간 만에 의식화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수업을 하시나요?” 심지어 그런 수업은 최고 수위의 실천을 종용하기도 한다. 운동권 출신 강사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강사단에 들어와서 학습하며 처음으로 사회의식에 눈을 뜬 강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사업주에게 계약서 쓰기를 요구하라거나 사업주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라는 식으로 “여러분들의 권리는 여러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하거나 투쟁 현장을 나열하며 “우리도 이런 투쟁에 연대하고 함께 나서야 합니다” 같은 말을 시연 시간에 흥분된 목소리로 강조하는 강사들이 많다. 재밌는 점은 강사단 학습에서 나름대로 감화를 받은 초보 강사들도 자기들이 받은 감화를 수업에서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른바 수업 목표를 자기 입으로 열심히 강변하는 강사.
수업 목표는 강사 입으로 강변하는 게 아니라 참여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며, 설령 참여자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더라도 참여자가 오래 숙고할 질문을 하나라도 품고 간다면 우리 수업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라고 내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여전한 강사들이 많다.
그뿐 아니라 우리 강사들이 제일 어려워하며 많이 했던 말 중의 하나가 “그래서 정답이 뭐라는 거야?”다. 뭔가 속 시원하게 정답이나 해결책을 알려주지 않는 수업을 몹시 답답해하는 건 학생들이 아니라 오히려 강사들. 그런데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가끔 대안학교나 혁신학교에 수업을 하러 가면 일반 학교에서는 보기 힘든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가령, “노동, 하면 떠오르는 것은?”하고 물었는데 학생들이 “전태일, 노동조합, 연대투쟁” 같은 단어들을 줄줄이 대는 경우다. 이런 학생들을 만나면 우리 강사들은 대체로 매우 반가워하며 그 학교 교사들의 성향을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과 한참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어? 이거 뭐지?’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자주 있다. 가령 ‘노동의 가치’에 관한 수업을 할 때의 예를 들어보자. 대학교수, 사회복지사, 자동차부품 생산노동자, 버스 운전기사, 청소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군을 제시해주고 일의 강도, 사회적 기여도, 보람의 정도, 위험도, 요구되는 책임성 등을 기준으로 각각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모둠별로 토론하여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매겨보게 한다. 대학교수의 임금을 100이라고 가정할 때 다른 노동에 대한 임금을 역시 모둠별로 토론하여 정해보게도 한다. 보통 이 수업을 진행할 때 일반 학교에서는 모둠 안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기도 하고 모둠별로도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앞서 얘기한 학교들에서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아주 손쉽게 기계적 평등으로 결론이 나거나 심지어 대학교수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이 거칠게 드러나 때로 교육진행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매우 진보적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발화가 결국은 반 편향 주입식 교육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른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 어렵게 들어왔다는 마이스터고에 가면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한다. 강사가 무슨 질문만 하면 학생들이 거침없이 강사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수업 경험이 적은 강사들은 이럴 때 매우 신나서 수업을 하고 나오지만, 수업 경험이 많은 강사일수록 이런 수업을 하고 나오면 뒤끝이 찜찜하다. 정말로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일까? 끊임없이 자기 수업을 복기하며 질문하게 되는 것. 이른바 학교 성적으로 상위권 학생들은 어떤 교사나 강사가 수업을 진행해도 수업 진행자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른바 모범 답안(?)들이 학생들의 삶과 인식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이른바 노동인권교육 전문가 집단이라고 자부하는 전남센터 강사들의 처지는 모두 특수고용노동자다. 지난 5년간 전남 지역의 청소년노동인권을 위해 애써왔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노동권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조차 해본 적이 없다. 전남의 22개 시군에 일상적으로 장거리 운전을 하고 수업하러 가야 하는 처지에 산재보험은 언감생심이고, 태풍 예보가 있는 날 수업이 잡혀 있어도 학교 사정에 따라 그 수업을 거부하지 못하면서 학생들에게 ‘노동 안전은 권리’라고 떠들러 간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살면서 학생들은 다른 현실을 살고 있기라도 하다는 걸까?
이번 학기에도 강사들의 시연을 보고 나서 내가 물었다. “어느 정도 권리 의식이 생기면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강사들은 잠시 당혹스러워하다가 한 사람씩 대답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수업하는 것과는 다른 대답들이 쏟아졌다. “불편해져요” “피곤해져요” “자꾸 화가 날 때가 많아져요” “다른 사람에게 불편한 사람이 돼요” 우리 수업을 통해 권리 의식이 생겼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당당한 노동자가 되어 사업주에게 요구할 걸 요구하고 거부할 걸 거부하기가 과연 쉬울까? 내 권리를 스스로 찾는 용기를 내기까지 저마다 얼마나 많은 갈등과 망설임과 좌절과 포기의 서사가 있을까? 이런 것을 삭제한 노동인권교육은 너무 공허하지 않나?
나는 또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조금이라도 나아진 환경엔 역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연대의식이 생기고 나면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뜻밖에 이번엔 강사들이 시연하던 대로의 대답으로 곧장 이어졌다.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해요” 나는 다시 물었다. “정말 그런가요? 그럼, 연대가 뭔가요?” 강사들은 재차 묻는 내 질문을 당혹스러워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코카콜라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단식 투쟁을 알리는 웹자보가 올라왔다. 노동조합의 존재를 인정받길 바라는 이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리는 광고를 내기 위해 2천 원의 후원을 요청하는 웹자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 웹자보를 공유하는 것도 연대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웹자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 가지일까? 연대의식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어떤 사람은 ‘코라콜라를 LG에서 만드는구나’ 하고 지나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웹자보를 공유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서명까지만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후원금을 보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단식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을 부러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2천 원은 결코 큰돈이 아니지만, 굳이 인터넷 뱅킹을 열어 수수료를 감수하고 2천 원이라는 광고비를 보태기까지는 나름의 수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거나 마시게 될 때마다 그 노동자들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웹자보 하나를 보고 사람들이 발휘하는 연대의식도 이렇게 다르다.
거리에서 선전물을 나눠주는 노동자에게 잡상인 취급을 하지 않는 것, 장기 투쟁 중인 사람들을 보고 지겹다고 말하지 않는 것, 일인시위 중인 노동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거나 음료수를 하나 건네는 것, 굳이 인터넷을 뒤져 계좌번호를 찾아내고 후원금을 보내는 것, 단체후원을 하면서 편리한 CMS 신청을 하지 않고 수수료 몇 푼 아껴주겠다고 굳이 개별적으로 자동이체를 신청하는 것, 부러 시간을 내서 제 발로 투쟁 현장에 머릿수를 보태러 가는 것, 사업장에서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의 편을 들어 주는 것…. 연대의 서사도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까지 수많은 결이 있다.
노동인권교육에서 속 시원한 정답을 내놓고 싶어 하는 강사들의 수업은 대개 이런 수많은 결의 서사가 삭제되어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살아있는 감정들이 삭제된 채 언제나 가장 높은 수위의 실천으로 직행하는 정답은 우리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리고 우리 운동이 모든 사람이 활동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노동인권교육에서 강사가 목표로 할 수 있는 최대치와 최소치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강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소크라테스 이후, 사람에게 배움을 일으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 중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품게 하는 것만 한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인권 ‘교육’을 위해서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는 다음 회에 이어가 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