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위원장
‘새싹, 푸르름, 미래, 자유, 럭비공, 질풍노도, 가능성, 희망, 탱탱볼, 열정, 꿈……’
지난주, 청소년 노동인권을 주제로 한 전남지역 교사직무연수에서 ‘청소년’ 하면 떠오르는 것을 적어보라고 했을 때 나온 말들이다. 어느 비청소년 집단에 물어봐도 위 대답에서 벗어나는 생각은 별로 없다.
기본적으로 대다수의 비청소년들이 생각하는 청소년은 ‘미래’를 위해 존재하며, 그럴 때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더 많은 경우 현실에서 청소년의 이미지는 순수하거나 멍청하거나, 병들었거나 유약하거나, 혹은 위험한 ‘아이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비청소년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대개 청소년은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가르쳐야’ 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들이다.
‘하찮은 소모품, 경제적·인격적 착취, 강제노동, 위험과 불안정, 폭력의 일상화, 성희롱·성폭력……’ 등 밑바닥 노동의 사례들로 청소년 노동의 현주소를 보여주면 매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청소년 알바노동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으면 대개 ‘알바생, 고학생, 용돈벌이, 사회경험’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일탈’이나 ‘비행’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청소년이 알바노동을 한다고 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이 ‘왜?’ ‘돈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인 것.
결국 청소년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청소년 노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청소년 노동을 규정하는 비청소년들의 태도에 따라 청소년 노동의 현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여성을 집에서 애나 봐야 할 존재로 여길 때 여성 노동자가 반찬값 벌러 나온 여자로 취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공부나 해야 할 ‘애들’은 노동 현장에서 용돈을 벌러 나오거나 기껏해야 사회경험을 하러 나온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니 여성이든 청소년이든 그 노동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젠더가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인 것처럼 ‘아동·청소년기’ 역시 그렇다. 민족, 국가, 가족 등이 그러한 것처럼 ‘아동·청소년기’와 ‘학교 체제’ 역시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발명품이다. 그전까지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가족’이 노동력 재생산의 기본 단위가 된 것처럼 근대의 학교 역시 자본주의 재생산의 도구로서 발명되었다. 다시 말해 모범적 국민과 효율적 생산 주체가 필요해진 자본주의 체제가 특정 시기의 사람들을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가두고, 우리가 보호해줄 테니 노동시장에 필요한 적절한 노동력으로 성장하라고 가둔 곳이 바로 학교 체제다.
근대 이후, 그러한 학교 체제하에서 ‘이팔청춘 꽃띠’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자연적 생체주기와 발달을 무시당한 채 근대적 규범과 규율 속에 ‘아동 혹은 청소년’으로 새로 태어나 미성숙한 존재로서 통제와 훈육의 대상이 되었다. 이몽룡이 성춘향의 머리를 올려준 나이가 바로 열여섯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나이 역시 열여섯이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조부가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고 내 조모가 첫 아이를 낳은 나이가 바로 성춘향보다 한 살 위인 열일곱인데 이제 그 모든 것이 19금인 것이다. 마치 자연법칙을 대하듯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동·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관념이 만들어졌고, 그 관념은 당연히 보호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런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은 참여할 기회를 차단당하고 따라서 실수할 기회도 차단당한다. 그것은 곧 성숙할 기회, 책임질 기회를 차단당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은 당연히 점점 미성숙하고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은 그러한 청소년들을 보고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관념에 확신을 가진다. 이렇게, 미성숙의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이 사회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지만 아동·청소년을 존중하는 법은 배우기가 매우 힘든 사회다.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청소년 노동의 현주소를 알게 되고 나서 “우리 청소년들 너무 불쌍해요” 같은 지극히 시혜적인 발상으로 이 교육을 시작하는 사람도 아주 많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노동’에 방점을 찍고 이 교육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청소년인권은 페미니즘이나 소수자인권이 그런 것처럼 부차적인 옵션으로 골칫거리가 되는 경우가 숱하다. 어떻게든 ‘가르쳐서’ 당당한 미래의 노동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발상도 매우 흔하다. 교사들은 ‘학생인권’이란 말만 나오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교권’을 부르짖는다.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비청소년들은 ‘내 자식 같아서’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선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녀를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하는 법을 도무지 배우지 못한 대다수의 부모들을 생각할 때 청소년들에게 ‘내 자식 같아서’ 혹은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은 얼마나 끔찍한 말이겠는가?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대개의 아동이나 청소년이 가장 처음 ‘노동’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경험이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벌로 화장실 청소를 해본 경험.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 받는 것이 벌이다. 그러니 청소년에게 노동은 벌인 것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노동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당당한 인식을 가질 수 있을까?
뿐만 아니다. 우리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제일 먼저, 좋게 말해 윗사람에 대한 예절 다른 말로 하면 지시-복종 문화부터 배운다. 화장실이든 출입 통로든 위계에 따라 엄격히 분할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면서 획일적으로 강요된 교복을 입고 시시때때로 복장 단속을 받으면서 강제된 시간 규율에 따라 초강도의 장시간·강제 학습 노동을 해야 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거기서 학생들은 지루함을 견디는 연습을 하고, 상벌점제와 성적 경쟁에 따른 차별에 익숙해지며, 언제나 대체 가능한 도구화된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학교를 비롯한 사회는 성적으로 대표되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학생들 개인에게 묻는다. 그뿐인가? 학생회다 학급회의다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가장한 장치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결정권이 전무한 학교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가짜민주주의를 배우고, 교실에서의 경쟁과 서열화는 자주 교사보다 미운 학생을 만들어 낸다. 바로 ‘갑’보다 미운 ‘을’이다. 이러한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해자로서든 피해자로서든 왕따나 괴롭힘을 경험한다. 성적이나 가정형편에 따라 특혜를 받거나 열외되는 치외법권 영역이 있다는 것도 학교에서 배우고, 친교와 교류조차 통제당하며, 반별 대항 경쟁 등을 통해 집단주의와 가족주의를 당연시하게 되고, 아주 자연스럽게 지배자의 언어와 세계관을 체득하게 된다. 자, 이러한 경험들을 고스란히 노동 현장으로 옮겨보자. 뭔가 좀 다른가? 학교에서 내면화된 이러한 것들은 학생들이 노동자로 살아갈 때 어떻게 나타날까?
엄연히 학교 밖 청소년들이 존재해도 대다수 비청소년들의 생각 속에 청소년은 곧 학생이다. 따라서 학생이든 학생이 아니든 청소년들은 학교 안에 있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고,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은 온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대개 7~8세부터 18~19세까지 10여 년의 기간 동안 자기 자신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재생산 도구로서 길러진 사람들이 노동 현장에서 몇 시간의 노동교육으로 당당한 노동자가 될 수 있다고? 노동교육이 정규교과목이 되거나 시간이 늘어나면 된다고? 과연?
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 노동교육 현실을 해외 사례와 비교하며 이 나라 노동 현실이 이 모양인 것은 노동교육이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청소년인권과 노동인권이 어떻게 교차하고 청소년인권이 노동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역시 놓쳐서는 안 되는 문제가 아닐까? 그러나 학교가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 도구라는 이야기만으론 충분치 않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서 살 수 없고,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면서 사회 곳곳에서 저항하며 살아가듯이 학교 역시 각기 다른 가치가 경합하고 교사든 학생이든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 나아가 청소년인권은 노동인권을 위해서라도 존중되어야 하고, 또 존중받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청소년은 누구인가? 청소년은 ‘미래 사회의 주역’이거나 ‘미래의 노동자’라고? 그렇지 않다. 청소년은 우리와 함께,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다. 그렇다면, 청소년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바라는 비청소년들은 그들 곁에서 누구여야 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