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정책팀장, 노동당 당원, 노동·정치·사람 회원
‘도시정치’라고 하면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떠올린다. 자연스럽게 대구로 농촌정치 또는 지역정치의 상관성이 따라온다. 하지만 도시정치에서 ‘도시’는 구체적인 공간적 범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구태여 개념적 설명을 하자면 물리적 공간인 ‘시티(city)’와 하나의 현상인 ‘도시적(urban)’의 차이랄까.
68혁명을 지나가던 시기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말이 도시 내 저항자들, 특히 대학을 거점으로 삼던 젊은 활동가들을 사로잡았다. 그동안 좌파이념이 작업장과 노동계급 중심의 관점으로 노동운동과 대중운동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도시에 대한 권리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가진 복합적인 차원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혹자는 68혁명 이후의 신좌파들이 전통적인 좌파가 가진 노동중심성을 폐기했다고 하나, 이는 자본주의 모순이 나타나는 복합적인 측면을 너무 일면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의 노동은 직접적인 체벌과 통제의 과정을 통해서 작동했지만, 지금은 작업장 내 형성된 이중 삼중의 노동구조로 ‘스스로 통제’하도록 만든다. 이를 작동시키기 위해 작업장 밖에서는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장치들이 작동한다. 그래서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말은 단순히 ‘도시에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넘어선다. 적어도 도시라는 것이 자본주의 과정의 결과물이라면 당연히 이는 생산에 참여하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도시에 대한 권리는 익숙한 ‘권리화’의 경로를 거치면서 적극적인 비판적 의미가 퇴색되었다. 원래의 의미대로 한다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한 도시에 대한 권리가 충족될 리 없다. 그러니까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것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사회경제적 요구로 변환하는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지속적인 사회 투쟁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마치 인권선언이 몇몇 제도적 조치로 ‘달성되었다’ 평가받는 것처럼 도시에 대한 권리도 측정 가능한 현실적인 지표로 변한다. 임대주택의 비율은 전체 주택 중에서 비시장적 주택 유형의 비율을 보여주는 것이지, 임대주택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분배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서울시가 공급하는 사회주택이 거주자의 부담 가능성이 아니라 시세가를 기준으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보자.
애초 도시에 대한 권리를 말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도시 혁명>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를 넘어설 것을 밝힌 이유는 이 때문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가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거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축소되는 한 도시의 문제는 집단화되지 않고 개별적인 도시민들의 신체를 가로지른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행성적 지구화’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시티’에서 ‘어반’으로 전환한다. 이런 맥락에 놓인 관점은 도시의 문제가 단순히 물리적 경계를 가진 특정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로서 ‘도시화’ 자체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이를테면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소비패턴은 60~70년대 미국 도시의 교외화가 가진 대량소비 과정의 파편들이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대형마트는 새롭게 공급되는 아파트의 가격을 상승시키는 매력 요소이자 도시 내 소비재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된다. 그런데 이런 마트형 공급체계가 대도시의 양식만은 아니다. 이미 중소도시를 넘어서, 농협이라는 협동조합 조직까지 농협마트라는 방식의 판매 형태를 장착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소비의 마트화라는 현상은 도시 과정의 고유한 특징으로 등장한 후 보편적인 소비 형태로 확산됐다. 아파트 현상은 어떤가. 애당초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고안되었던 아파트는 근린시설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다. 중소도시의 신시가지와 농촌지역의 읍내 신시가지도 모두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선도하는 것이 민간 아파트 시장이 아니라 LH 등 국가가 운용하는 공사들의 전략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를 일반화하면 고밀 지향 개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도시의 고밀 지향 개발은 거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띠는 현상이다. 여기에 에너지 문제나 문화 창작과 향유의 문제까지 접근하면, 지금 주류화된 삶의 양식은 사실은 ‘도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적 도시화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이런 현상이다. 그러니까 도시와 농촌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도시화라는 전지구적으로 공통적인 문제를 고민하자는 말이다. 사실 도시와 농촌이 대립한다는 – 그래서 도시가 농촌을 수탈한다는 – 관점은 농촌에 대한 배타적인 관심과 지원을 정당화하는 논리이지만, 역설적으로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공적 재원의 낭비가 농촌지역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소홀하게 한다. 무엇보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농촌 지역을 비자발적 수탈 대상으로 접근함으로써 도시에 거주하는 비자발적 이주자들의 구조적 문제를 무시한다. 이를테면 서울시는 2000년대 이후 순수하게 인구가 유출되는 도시인데, 유독 20~30대에서만 순유입이 많다. 이유는 일자리와 학교 때문이다. 이들의 이동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제적이고 구조적이다. 이들에게 ‘농촌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박근혜가 중동 이주를 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 문제를 ‘선택의 문제’로 만든다는 오류를 가진다.
따라서 도시정치는 단순히 도시지역의 정치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자본주의 체계가 가진 축적 체계의 가장 구체적인 공간으로서 도시의 과정을 주목하도록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중요한 점은 과거 르페브르가 고민했던 ‘도시에 대한 권리’가 겪은 개념의 변화로, 도시정치의 범위를 협소하게 잡는 것이다. 단순히 임차상인들의 문제에 연대한다고, 재래시장 상인들이나 주거세입자 등과 함께한다고 도시정치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비슷하게 대중교통에 대한 활동이 곧 도시정치의 문제 설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도시에서의 문제가 어떤 ‘도시화’의 과정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일반적인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그래서 현실에서의 투쟁이 그런 모순의 무엇을 극복하기 위한 것인지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런 부분들을 주요한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