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7년 11월 17일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주최한 연합심포지움에서 발표한 문건입니다.
IMF 20년, 헌정질서의 변화와 전망
– 취약한 헌정질서가 초래한 외부충격의 효과
윤 현 식(노동정치연구소(준) 책임연구원)
- 들어가며
IMF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2002년, 시중은행연합으로 만들어진 비씨카드의 한 광고는 엄청난 유행어 하나를 우리 사회에 뿌렸다. “부자 되세요”가 그것이었다. 이 유행어의 여파는 가히 쓰나미급이었는데, 기존에 통상적 덕담이었던 “건강하세요”, “오래 사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등을 한순간에 밀어내고 덕담계의 지존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배금주의를 경계해왔던 사회적 분위기가 이토록 순식간에 노골적인 배금주의 경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광고의 컨셉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효과를 의도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아 인적관계가 파탄나고 물적 토대가 붕괴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던 남한사회의 대중에게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시장지상주의로 무장한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한 순간에 무력화시키고, 오로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내심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더라도 무방하다는 인식을 공공연하게 확산했다. “부자 되세요”가 끊임없이 되뇌어졌던 것은 이후 우리 사회가 공존의 가치보다는 개별적 생존투쟁만이 남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일종의 징후였다.
헌정질서 차원에서 이 징후가 상징하는 함의는 다름 아닌 ‘민주공화국’의 이념이 제 위상을 유지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기본적 규범구조가 작동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부조와 공존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핵심적 지향이라고 한다면, 생존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하는 IMF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는 이러한 지향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렇게 되면 1997년 IMF 사태는 우리 헌정질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고, 결과적으로 헌정질서를 뒤흔든 결정적 사건으로 규정될 것이다. 전통적인 도덕감정을 창졸간에 실종시키고, 오로지 돈을 버는 것만이 삶의 목적으로 만들며, 그 과정에서 공존공영의 가치 대신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자가 자원을 독식하도록 만드는 아비규환을 만든 원인이 IMF 사태였다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과연 IMF 사태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인가? 어쩌면 이 사회는 이전부터 오래도록 공동체적 삶의 미덕보다는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을 예비했거나 혹은 실질적으로 그러한 사회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IMF 사태는 한국사회의 헌정질서를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흔들어놨다기보다는 오히려 감추어져 있었던 구조를 드러내게 만드는 기제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달리 말해, IMF가 요구했던 조건들이 처음부터 우리 헌정질서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면, IMF 사태는 그 자체로 헌정질서를 변화시켰다거나 파괴했다고 보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헌정질서 차원에서 IMF 사태를 평가하고, 추후 유사한 사례의 반복을 방지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과연 오늘날 한국의 헌정질서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 헌정질서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헌정질서의 작동체계 안에서 IMF 사태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IMF 사태가 헌정질서에 미친 영향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우선 우리의 헌정사가 헌정질서의 정상적 유지를 지속적으로 추구했었는지 여부를 살피고자 한다. 헌정질서가 구축되는 과정, 그 과정으로 인해 발생한 근본적인 문제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헌정질서에 대한 내부의 충격과 그 충격이 미친 영향을 극복하는 과정을 검토한다. 이 과정은 주로 헌정사를 통해 반복된 민주주의의 후퇴와 회복의 사건들을 통해 확인한다. 이후에, 내부의 충격과 대별되는 외부의 충격이 헌정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IMF 사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헌정질서에 가해지는 내부충격과 외부충격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구분하고, IMF 사태로 인한 헌정질서가 교란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헌정질서가 이미 이 혼란을 내재했었던 것인지를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IMF 사태 이후 필요한 헌정질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려하고, 건설적이고 단단한 헌정질서의 구성방식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도록 하겠다.
- 허약한 헌정질서의 성립과 내부충격
(1) 헌법, 헌정체계 그리고 헌정질서
헌법은 국가의 얼개다. 헌법이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국가사회가 제 틀을 형성한다. 헌법제정권자, 즉 주권자들이 국가의 이념과 형태, 국가기구의 구성과 책무를 결정하고 이에 따라 국가의 체계가 형성된다. 헌법의 규범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체계가 헌정체계이며, 이 헌정체계가 헌법의 이념과 원리에 의하여 체제를 작동하는 것이 헌정질서다. 헌정질서는 달리 말하면 주권자의 의지가 헌법이라는 규범 안에서 실천적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이 때 헌정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주권자들의 의지와 정치적 실천이 관건이 된다. 주권자들의 이러한 의지와 실천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현행 헌정질서의 유지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헌정질서의 구성이다. 헌정질서의 유지는 국가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는 차원의 헌법적 실천이고, 새로운 헌정질서의 구성은 시대적 변화와 항구적 안녕을 창출하는 헌법적 실천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주권자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헌정질서를 수용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행의 헌정질서를 회의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태도를 가질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때로는 헌정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저항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며, 헌정질서의 변화를 목적으로 개헌을 선언할 수도 있다. 이처럼 헌정질서를 현상유지의 목적에 한정된 질서가 아니라 변화 발전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체제로 이해할 때 헌법의 규범구조와 헌법현실의 간극을 메울 계기와 요건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헌정질서를 구성하는 주체인 주권자들이 언제나 발전적 방향에서 주체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주권자들은 때로는 반동적인 판단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때 주권자들의 이해가 반영되고,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며, 국가기구가 그 설치의 목적과 책무의 범위 안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바람직한 헌정질서가 아니라 정 반대의 ‘질서’가 나타날 수도 있다. 주권자가 오히려 헌정질서의 바깥으로 배척되는 상태, 그것은 곧 주권자들의 직접적 참여를 통한 주체적인 이해관계의 투영으로서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아닌 주권자들을 정치의 저변에서 퇴장시키는 탈정치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헌정‘질서’는 ‘주권자의 의지가 헌법이라는 규범 안에서 실천적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헌법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헌정질서는 단속적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국가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도전을 내부충격으로, 국가체제 바깥에서 발생하는 도전을 외부충격으로 구분해보자. 기실 내외부의 충격 속에서 헌정질서는 유동한다. 건강한 헌정질서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충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견디거나 조속히 회복할 것이다. 반대로 헌정질서가 건강하지 않다면 강한 여파로 사회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여기서 헌정질서의 건강성을 판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헌정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주권자들의 능동적인 의지와 정치적 실천이 될 것이다. 즉, 헌정질서가 주권자의 주체적 의지의 발현으로 성립되었으며 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주권자의 적극적 실천이 있을 때 헌정질서는 내외부의 충격을 견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반대로 주권자가 배척되거나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 상태에서 가설적으로 이루어진 헌정질서는 항상적으로 내외의 충격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2) 헌정질서의 최초 구축과 그 한계
건강한 헌정질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주권자들의 의식과 의지와 실천이라는 요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헌정사가 건강한 헌정질서를 성립하는 과정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제헌 이래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9차에 걸친 개헌을 거치는 동안, 주권자들의 주권행사, 즉 헌법제정권 및 개정권의 행사가 충분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주권은 단지 어떤 상태에 대하여 결정을 할 수 있는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칼 슈미트의 관점처럼, 헌법이 주권자의 결단이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주권은 결단을 할 수 있는 권리로 한정된다. 그러나 주권은 일정한 힘의 보유 여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이행과정 전체를 통틀어 이해하여야 한다. 즉 결정의 권한만이 아니라 결정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전반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에서 작동하는 총의를 주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권의 개념을 이렇게 전환하면, 주권의 행사라는 것은 주권자들이 헌정질서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그 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총의를 모아내는 일체의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출되는 헌정질서야말로 지킬 가치가 있는 헌정질서이며 변화의 가능성을 간직한 헌정질서가 된다.
우리의 헌정사는 제헌과정에서부터 이러한 헌정질서를 구축하는데 실패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국가건설은 이에 대한 주권자들의 열망과는 별개로 주권자들을 정치의 주체로 부각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새로운 국가체계의 이념과 구조에 대한 주권자들의 이해와 참여를 모색하지 못한 채, 헌정질서의 구성이 일부 법률전문가와 정치인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헌정체계를 설정하고 헌정질서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일제가 물러나고,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신탁통치를 둘러싼 내외의 불안정한 동학과,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 좌우의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상황에서 헌정질서에 대한 주권자들의 이해와 광범위한 참여를 추구하기에는 물리적 어려움이 있었음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촉박한 시간과 사회적 상황의 한계가 주권자들을 정치로부터 배제하고 단지 법리적인 헌법조문의 구성이라는 협애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헌정질서 구축을 정당화시키는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는 없다. 제헌헌법에 따른 헌정질서는 헌법의 탈정치화를 전제로 조성된 것이었으며, 다양한 사회적 이념과 갈등을 조정하고 정리하는 헌정질서의 작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허약하게 출발했던 헌정질서는 그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2년 만에 강력한 충격을 받게 된다. 6·25 한국전쟁은 헌정질서에 가해진 내적 충격이자 외적 충격이었다. 전쟁의 기승전결을 모두 분석하지 않더라도, 허약한 헌정질서는 이러한 충격을 견뎌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가 이러한 충격을 예비하기까지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헌당시에 구성된 헌정질서가 이념적 갈등을 비롯하여 주권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조율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면 파국적 양상의 도래에 일정한 내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가기관과 기득권세력은 헌정질서라는 명분을 이용하여 사회적 갈등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조장했고, 민간인 학살과 같은 국가폭력을 용인하는 기제로 헌정질서가 동원되었다. 미 · 소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 갈등구조에 기민하게 대처하는데 헌정체계는 한계를 보였으며, 결국 동란의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헌정질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실질적인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헌헌법이 사회적 통합의 목적의식과 기능을 주권자의 저변에서부터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개정의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제헌헌법을 명목뿐인 헌법으로 전락시켰던 이승만 등 정치세력들은 전시상태에서 추진했던 제1차 개헌 및 제2차 개헌에서도 건강한 헌정질서의 구축을 추진하지 않았다. 강대한 국가권력에 비해 현저하게 약했던 시민사회의 힘이 헌정질서의 재구축을 추동하지 못했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정질서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소기의 책무와는 전혀 동떨어져 정권의 안위를 위하여 폭력을 행사한 국가기구는 시민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발동했다. 정권은 지속적으로 주권자들을 정치에서 배제시켰으며, 또는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 주권자들은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첫 머리에 배치한 헌법의 원리와 구조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채 수동적인 동원대상이 됨으로써 능동적으로 헌정질서를 유지할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이 악순환 속에서 주권자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사회의 시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봉건사회의 신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3) 쿠데타를 예비한 제3차 개헌과 유신시대의 헌정질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주권자들의 저항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몰락시킨 1960년 4·19혁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주권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장기집권야욕을 무산시키면서 장면정부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헌정질서를 만들어낼 절호의 기회를 주권자들은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새로운 헌정질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주권자들은 배제되었다. “구체제 타파에는 기여했으나 신체제 건설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헌헌법이 가지고 있었던 원천적 한계로 말미암아 4·19 혁명의 의미는 말 그대로 구체제의 전복을 통해 신체제로의 전환을 야기한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19혁명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낸 외에 주권자들이 새로운 헌정질서를 구축하는 기제로 승화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제헌헌법에서와 마찬가지로 1960년 헌법 위에서 형성된 헌정질서는 또다시 불안한 상태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주권자들의 폭넓은 이해와 적극적 참여로 구성되지 못한 1960년 헌정질서는 불과 1년 만에 전복되고 만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던 것이다. 취약한 기반의 헌정질서가 내부충격에 의하여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1960년 헌정질서의 취약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증거는 주권자들이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에 대하여 동조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장준하가 발행인으로 있었던 사상계는 권두언에서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쿠데타를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이 ‘혁명’이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며,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선언했다. 사상계의 이 선언은 당시 헌정질서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사상계의 권두언을 통해 합리적 유추가 가능한 부분은 당시 쿠데타를 바라보던 주권자들의 인식이다. 사상계를 꾸려 나갈 수준의 지식인들조차 쿠데타에 대해 비록 한 순간이나마 긍정적 반응을 보였음은 헌정질서를 둘러싼 정국을 이해하기에는 당시 대중의 헌정질서에 대한 이해가 매우 협소했음을 보여준다. 애초 1960년 헌정질서가 주권자들의 의지가 반영된 상태에서 출발하지 못했기에 박정희의 쿠데타가 이미 이로부터 예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정권을 획득한 정치세력에 의해 조장되는 경향마저 있었다. 즉 정권을 획득한 주체는, 그 주체가 선거를 통해 등장했던 혁명을 통해 등장했던 쿠데타를 통해 등장했던 간에, 헌정질서를 저변으로부터 강화하고 주권자의 직접적인 개입과 쟁투를 통해 구축하려하지 않았다.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직업적 정치의 본연의 임무는 완전히 팽개친 채, 오히려 사회의 안팎에 적(敵)을 상정하고 대립을 부추기며, 통합보다는 분열을, 평화보다는 혼란을 야기했다. 그들은 안전, 안녕, 평화, 질서가 오로지 적의 축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으로 사회 전반을 적대의 구조, 피아 아의 관계로 분할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정권의 안전과 안녕, 평화를 추구했다.
헌정질서가 구성되는 단계에서부터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형태로 일그러지고, 그 일그러진 굴곡의 한 면을 타고 헌정질서 파괴세력이 준동하며, 이들이 애초부터 왜곡된 헌정질서의 단면을 더욱 찌그러트리면서, 주권자들이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현저히 줄어들고, 주권자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헌정질서의 불안은 가중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독재정권은 충분히 이용하게 되는데, 박정희의 경우만 보더라도 세 번에 걸쳐 주권자들의 민심을 악용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1969년 박정희는 3선을 위한 개헌을 시도했다. 정치권에서의 난장판에 가까운 반민주적 작태를 뒤로 한 채 국민투표에 부쳐진 이 개헌에서 유권자의 77.1%가 투표에 참여해 65.1%의 찬성으로 개헌이 이루어진다. 3선도 모자라 종신집권을 획책했던 1972년 유신헌법 개정 당시 국민투표는 투표참여 91.9%, 찬성률 91.5%라는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이 기록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자행한 후 치른 1980년 개헌에서 깨지지만,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둔 헌정질서 안에 종신총통제를 규정하는 헌법개정안에 이토록 놀라운 참여율과 지지율을 보여준 당시 주권자들로 인해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민주적 정당성마저 획득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기세를 몰아 박정희 정권은 불과 2년 남짓 지난 1975년 정초에 다시 헌법찬반 국민투표를 강행하는데, 이 때 비로소 주권자들의 반발이 눈에 띄게 나타났지만, 결국 이 국민투표에서조차 유권자 79.8%의 투표참여와 73.1%의 찬성으로 유신정권의 생명이 연장된다.
기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앞서 언급했던 헌정질서 불안 가중의 악순환 고리에 따른 수순이었다. 1975년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에 대한 주권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긴급조치 선포 등 억압적 통치기술을 구사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국면전환을 위해 실시한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을 받게 되면서 숨을 이었다. 폭압적인 사회분위기와 비판을 용납지 않는 국가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주권자들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반민주적 독재정권을 용인하는 비율이 이토록 높을 수 있었던 배경에 헌정질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그다지 확고하게 설정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4) 헌정질서를 둘러싼 1980년대 각축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을 짓밟은 신군부세력은 1980년 개헌을 통해 집권한다.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광주민주항쟁은 헌정질서라는 국가운영의 틀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서 발생한 혁명이었다. 온전한 헌정질서가 작동되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혈의 참극을 벌이며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세력은 또다시 헌법을 바꾸게 된다. 사실상 이쯤 되면 헌법이라는 것에 대하여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제헌 이래 1980년 헌법에 이르기까지 주권자들의 요구와 개입을 통해 만들어진 헌법이라는 것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4·19 혁명이 새로운 헌정질서를 구성할 절호의 기회를 주권자가 부여한 사건이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당시 주권자의 요구가 직접적으로 헌법의 개정으로 이어지지도 않았거니와 1960년 개헌 역시 주권자의 이해를 반영하는 개헌이라기보다는 제헌헌법 이래 두 차례 개헌되었던 이전 헌법의 틀에서 국가기구의 구성의 일부를 바꾸는 수준에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헌법 역시 주권자들의 정치적 합의라는 헌정질서 구축의 기본적 전제는 달성되지 않았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것처럼, 주권자들에게 총칼을 겨눈 상태에서 1980년 헌법은 채택되었는데, 유권자의 95.9%가 투표에 참여하였고 그 중 91.6%가 전두환 헌법에 찬성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작태에 항거했던 주권자는 1980년대에 들어 그 전보다 강력한 양상의 저항을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그 요인이 되었던 고등교육의 확대를 통한 인적 기반의 확대, 정권의 정당성 확보차원에서 시행한 자유화 조치에 따른 사회적 인식의 변화, 정치활동 해금을 통한 야권의 성장이 있겠고, 더불어 이러한 사회변화와 상충되는 정권의 반동적 정책들, 예컨대 소위 ‘3S 정책’으로 일컬어지는 우민화정책, 삼청교육대 등 국가폭력의 공공연한 행사, 고문과 조작으로 이루어진 각종 시국사건,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의 만연 등 정권이 자초한 폐단들이 있을 것이다. 거듭되는 북한의 도발로 인한 경색국면이 있었지만 동시에 최초로 남북정상회담 제안이 있었던 냉탕과 열탕을 오가는 대북관계, 국제적 데땅트 국면을 외면한 친미일변도의 대외정책과 광주민주항쟁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국내정서와의 대립 등도 주권자로 하여금 정권에 대한 판단의 깊이를 더해가는 대외적 정황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 내의 민주화세력, 시대적으로는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의 규모와 역량이 커졌다. 반민주적 반인권적 정권의 작태에 대한 저항적 의식 제고 및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계층분화와 계급 갈등, 더불어 지역과 산업부문 간 불균등의 심화와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나타나는 가치관의 변형 등으로 인하여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분화가 발생했다. 여기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 왜곡된 분배구조에 대한 저항이 커질 수 있었으며 1987년의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의 동력이 축적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87년 개정헌법, 즉 현행헌법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1960년과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구체제를 전복한 주체가 신체제 건설의 객체로 전락하는 사태가 반복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는 6월 항쟁에서 갑작스럽게 제기된 사안이 아니다. 이미 1983년에 김영삼은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1985년 2·12 총선에서는 야당의 주요 공약사항이 개헌이었다. 1986년에 접어들어 야권은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시작했고 상당한 여파를 몰고 왔는데, 이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한 때 개헌에 찬동하다가 야권의 분열상이 노정되자 태도를 바꿔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를 단행한다. 4·13 호헌조치는 결과론적으로 보면 호헌의 가능성을 정권이 스스로 잠식한 패착이 되는데, 6월 항쟁의 대표적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로 굳어졌듯이 당시의 호헌은 군부독재의 연장 이외의 의미로 주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6·29 선언’이라는 정권차원의 개헌수락선언이 있은 후 개헌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하지만 개정 헌법의 실질적 내용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주권자는 또다시 배제되었고 불안한 헌정질서는 지속될 것이었다.
1987년 개헌과정의 실질적 진행은 소위 ‘8인 정치회담’이라는 형태로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의 정치엘리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국회에 설치되었던 개헌특위조차 “조문정리 정도만을 담당하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될 정도였고, 당연하게도 이 공론화과정에서 시민사회는 결과물의 승인여부만을 담당하는 수동적 객체가 되었다. 다분히 효율성에 입각하여 헌법개정이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과제를 수행했던 것인데, 정치권에서 사활을 걸고 달려들었던 유리한 집권가능성의 조성이 개헌과정의 실질적 핵심논의사항이 되었고, 민주화의제는 부수적인 사안으로 전락하는 ‘최소주의적 개정’으로 1987년 헌법은 그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주권자가 조성한 민주화의 열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헌법으로 인하여 이후의 헌정질서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남게 되는데, 최근에 벌어진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은 바로 이러한 87년 헌정질서의 취약한 지점에서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각이었다.
(5) 소결
이승만의 영구집권야욕, 박정희의 종신총통집권음모, 전두환의 군부통치 연장 기획은 헌정질서의 왜곡과 교란을 야기한 내부충격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내부충격에 취약한 헌정질서가 유지되었던 것은 헌정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주권자의 심도 있는 이해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개입과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권자의 의지가 헌법이라는 규범 안에서 실천적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으로서 헌정질서가 본연의 위상을 정립하고 운영되었다면, 이러한 내부충격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거나 그 충격의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헌정질서를 구성하고 유지·발전시키는 주체가 주권자가 아니었기에 헌정질서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헌정질서의 담지자가 되어야 할 주권자가 신민으로 전락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내부충격과 외부충격이 중첩되어 벌어졌던 6·25 한국전쟁 역시 제헌을 통한 헌정질서의 정립이 출발에서부터 흔들렸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다.
주권자가 들고 일어나 헌정질서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고자 했던 저항의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4·19혁명이나 광주민주항쟁, 그리고 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은 주권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나서면서 헌정질서 파괴세력을 응징하고 민주적인 헌정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럼에도 주권자들이 새로운 헌정질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는 반복적으로 배제되었으며, 변화발전을 욕망했던 주권자들의 기대는 지속적으로 배반당했다. 이것이 한국 헌정사에서 헌정질서가 붕괴되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는데, 목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었던 정치세력들이 주권자를 배제한 채 조성한 그들만의 헌정질서는 결국 내부충격을 배태하는 조건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다만, 87년 헌법에 의해 구성된 헌정질서의 경우 내부충격에 대한 내성이 기존의 헌법에 의한 헌정질서보다 그나마 컸다고 인정할만하다. 적어도 87년 헌법 이래 정권은 군사독재의 연장 → 문민정부 →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민주화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진척을 2007년 대선 전까지 유지했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에서 집권한 이명박 정권과 2012년 집권한 박근혜 정권이 이 흐름을 역류하는 반동적 정권으로 전락했지만, 적어도 군부를 등에 업은 쿠데타 획책이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 등의 행태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것 또한 현행 헌법 하의 헌정질서가 나름의 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과거와 같은 내부충격을 막거나 또는 그 여파를 최소화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를 배제한 축소된 형태의 개헌으로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개헌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주권자의 개헌요구와 이 요구를 구호로 한 참여가 현행헌법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행 헌법의 헌정질서는 외부충격에 대해서도 내부충격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헌정질서와는 달리 일정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는가?
- IMF 사태와 헌정질서의 교란
(1) IMF 구제금융의 상황과 사회적 의의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김영삼 정부는 국회의 날치기를 통해 노동법 개악을 단행했다. 노동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는데,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의 주요 내용으로 실질적으로 대량해고가 가능하도록 만든 정리해고제의 법제화, 단체행동권을 무력화시키는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 및 하도급 생산 허용, 특히 쟁의기간 중 무임금 처리 법제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법 날치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민주노총은 즉각적인 파업을 선언하였고, 1997년 봄 결국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철회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정치파업을 통한 승리로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의미가 확인됨으로써 이후 10년에 걸친 진보정당의 창당과 원내진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의미 있는 사회적 사건이 벌어진지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거둔 승리의 성과들을 모두 반납함은 물론, 수십 년 동안의 투쟁을 통해 근근이 쌓아올린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IMF 사태다. 실질적으로 IMF 사태는 개별 국가의 헌정질서라는 것이 외부충격에 의하여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우선 IMF 구제금융의 조건을 보자.
| IMF 구제금융에 따른 한국의 주요 양허안 | |
| 구분 | 내용 |
| 거시경제목표 | GDP성장률 및 물가상승률 5% 이하 |
| 정책기본방향 | 재정·금융긴축, 시장중심적 금융산업구조조정 |
| 통화환율정책 | 물가억제를 위한 긴축, 단기적 고금리 허용, 변동환율제 유지 |
| 재정정책 | 원유세/특소세 인상 및 간접세과세기준 확대, SOC 지출/경상경비축소 |
| 금융구조조정 | 9개 종금사 퇴출, BIS 기준 8% 미달 은행 구조조정, 금융개방 |
| 무역자본자유화 | 무역관련 보조금/수입허가제 등 폐지, 자본자유화 |
| 기업지배구조 | 경영투명성 제고, 차입의존행태 쇄신, 정부개입 최소화 |
| 노동시장 | 노동시장유연화 : 정리해고완화, 파견근로제 도입 |
| 기타 | 금융실명제유지, 통계자료 투명성 제고 |
| 실행기준평가 | 98년 1월 양적실행기준 마련, 분기별 검토 |
표면적으로 IMF의 요구조건은 관치금융과 재벌의 방만한 경영구조가 왜곡한 한국의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IMF의 요구조건이 가진 핵심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완벽한 이식이었고, 시장지상주의를 본질로 하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종국적 목표는 소수 기득권층의 경제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었다. 비록 IMF가 제시한 조건들이 재벌중심경제구조에 일정한 파열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나, 신자유주의의 속성상 재벌의 총수들이 돈을 벌 자유를 규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IMF의 요구조건으로 정리된 경제위기 상황에서의 구조재편은 특정 재벌에게 부를 몰아주는 효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실제로 한국은 이후 이 과정을 착실하게 밟았다.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등 내실 있는 공기업들은 줄줄이 민영화의 과정을 밟았고, 외국에 매각되었으며, 쌍용자동차가 대우자동차에 인수합병되는 등 대기업 간 대규모 인수합병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반면 노동자에게 전가된 피해는 감당이 어려울 정도였는데, 1996년 연말의 노동법 날치기를 총파업으로 무력화시키면서 막아냈던 노동시장유연화는 국가경제회생이라는 명목 하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정리해고의 요건은 완화되었고 파견근로제가 도입되었다. 한번 물고를 튼 노동시장유연화정책은 IMF 사태가 일정하게 정리된 이후에도 오히려 강화되었고, 참여정부 당시 이루어졌던 소위 ‘비정규직 로드맵’을 통해 제도적으로 고착되었다. 비정규직의 양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고용불안은 가중되었으며, 대량해고를 동반한 구조조정과 저임금 불안정노동의 폭증 속에 노동자들의 삶은 저하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극단적 양방향성에 의하여 기업의 자유와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이렇게 확장되었으며, IMF 구조조정의 긍정정 여파로 인하여 후진적 경영양태를 개선한 재벌은 몸통을 더 불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IMF 이후 한국의 구조는 더욱 거대해진 독점자본의 위력과 한껏 위축된 노동자들의 무력화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모든 의제는 경제회복이라는 유일의 의제로 수렴되었고, 시민사회의 동력을 바탕으로 고려할 수 있는 다른 저항의 방식은 제도정치권 내에서 제대로 논의되어보지 못한 채 소멸했다. 구제금융을 필요로 했던 개별 국가의 양상에 대한 구분 없이 일방향적인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제시했던 IMF와 마찬가지로, 한국정부는 구제금융신청을 제외한 IMF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다른 방법, 예를 들어 모라토리움이나 외환통제같은 방식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1997년 연말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IMF의 요구에 대하여 재검토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으나 공약사항이 무색할 정도로 유야무야 되었고, 집권 이후 국민의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IMF의 요구조건을 이행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고 구제금융신청을 통해 조속하게 경제위기상황을 극복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시 동시에 외환위기를 겪었던 말레이시아가 외환통제를 통해 외화반출을 금지하고 외국에 있는 자국 통화를 회수하면서 고정환율을 유지했던 것이나, 한국보다 몇 달 늦게 외환위기에 직면했던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던 것에 비추어 한국의 대응은 매우 수동적이었다.
(2) IMF 사태가 헌정질서를 교란하였는가?
여기서 발생하는 의문점이 바로 헌정질서의 취약함이 IMF라는 외부충격을 유입시켰는가라는 점이다. IMF라는 헌정질서에 대한 외부충격은 헌정질서에 대한 내부충격과 어떻게 다른가? 또는 어떻게 같은가?
앞서 노동과 자본의 대조적 상황전개를 보았지만,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한껏 태동하고 있었던 시민사회의 역량이 자본의 구조재편에 휩쓸리면서 정치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상황전개였다. 만일 당시의 헌정질서가 주권자의 통합된 이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구가하던 상황이었다면 IMF 구제금융의 조건에 대하여 말레이시아나 러시아와 같은 수준의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의 답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바로 IMF 사태 당시 벌어졌던 금모으기 운동이다. 1998년 1월부터 4월까지 진행된 금모으기 운동기간 동안 약 227톤의 금이 모였으며, 김대중 전대통령은 이를 두고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고 회고하였다. 금모으기 운동은 실질적으로 IMF 사태를 극복하는 데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이 운동의 와중에 대기업들은 오히려 금 사재기로 이윤을 챙기는 등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함에도 국가적 위기사태에 전 국민이 합심하여 위기를 극복한 사례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헌정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였다면 국민들이 금을 모아 재벌을 살리는 모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정상적인 헌정질서가 작동했다면 오히려 국가를 부도사태로 몰아간 정부와 함께 환란을 조성한 기업들의 위기를 주권자의 책임으로 떠넘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금모으기 헤프닝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주권자들을 여전히 신민적 지위로 고착시키는 사고방식이 작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동을 거듭하면서 칭찬한 대상이 ‘백성’이었음은 상징적이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입장에서 주권자는 여전히 백성이었고, 이들이 국가적 위기상황의 책임소재를 밝히는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자들의 책임을 덮어줄 수동적 객체일 때 감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말레이시아나 러시아와 같은 대응방식을 고려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된다. 오히려 헌정질서는 그나마의 동력마저도 잃으면서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질서로 변질된다. 3·1혁명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화한 적이 없는 ‘민주공화국’의 이념은 상실된다. 민주주의는 자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공화주의는 무한경쟁만이 생존의 전략이 되는 상황에서 희화화된다. 노동3권을 비롯한 기본권은 국가위기극복을 위하여 제한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경제민주화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헌법의 규정은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급격한 헌정질서의 교란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면서 위기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IMF라는 외부충격에 의한 헌정질서의 교란 양상은 내부충격에 의한 그것과 배경과 현상에서 거의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1997년 IMF 체제로까지 일컬어지는 외부충격의 배경을 보자면, 이미 군사정권 아래 검토되었고 민간정부들에 의해 전개되었던 신자유주의정책의 근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987년 헌법이 경제민주화규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경제민주화를 현실화기 위해 무엇을 할지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경제주체의 입장에 따라 달랐다. 더 적나라하게 말해 경제헌법의 내용을 주권자들은 아예 알지도 못했으며, 그 와중에 주권자들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한경쟁의 쳇바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여기서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이었던 노태우 정권이나 군사독재와 연합했던 문민정부와 이후 들어선 국민의 정부 및 참여정부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민주공화국의 이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3권 등 기본권의 보장, 분배의 정의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민주화와 같은 헌정질서의 핵심은 헌법 조문으로 정리된 문장으로만 남아 있었을 뿐, 헌정질서의 작동이라는 현실적인 실천과정으로 승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IMF가 가져온 헌정질서의 왜곡이 얼마나 장기간에 걸쳐 그 여파를 미치고 있는지는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경제조치들을 미루어볼 때에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IMF 사태를 빌미로 한국의 경제구조에 뿌리를 내린 자본의 이해관계는 IMF가 극복되었다고 선언된 이후에도 강화되었고, 이명박 · 박근혜 정권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환율 개입에 정부차원의 힘이 소요되면서 자본의 이윤을 보장했던 이명박 정권의 정책이나, 5대 노동입법안과 일반해고지침 완화 및 취업규칙변경요건 완화 지침으로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가중시키고 자본의 이해에 맞는 각종 규제완화법제를 남발했던 박근혜 정권의 방침은 이미 IMF 사태에서 와해된 헌정질서의 허약함 위에서 태동했던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부자 되세요” 에피소드는 IMF 사태 이후 헌정질서가 교란된 실정을 상징한다. 일정하게 닫힌 계 안에서 어떤 이가 부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부가 상실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남한 5천만 전 국민이, 더 나가 지구 70억 인류가 동시에 (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부자가 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당시의 헌법이자 현행 헌법의 기본 이념과 원리,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헌정질서는 결코 공동체 구성원 일부의 빈곤을 빌미로 일부의 부유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이러한 헌정질서는 작동하지 않고, 거대자본 중심의 경제구조개편과 이윤독식 그 반대편에서는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노동의 증가, 더불어 사회복지망의 붕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화 전반에서의 보수화와 탈정치화가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이처럼 내부충격에 의한 헌정질서의 파괴나 외부충격에 의한 헌정질서의 교란은 사건발생의 배경, 경과, 효과에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대안마저 같을 것인가? 즉 주권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주체적 개입을 통해 내부충격을 해소하거나 새로운 헌정질서가 구성될 기회를 만들어내듯이 외부충격에 대해서도 이러한 방식의 헌정질서 재구성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개별국가의 내부적 변화의 동인과 국제관계와 이어진 외부적 변화의 동인이 원천적으로 성격을 달리함에 따라 외부적 충격에 따른 헌정질서의 교란에 대해서는 개별국가의 주권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인가?
(3) 주권자를 지키는 헌정질서와 주권자가 지키는 헌정질서
헌법도 법이다. 따라서 헌법은 여타의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징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당위와 규범이라는 실체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헌법이 당위와 규범으로서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헌정질서가 헌법의 규범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헌법이 당위와 규범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면 헌정질서라는 것은 애초에 허례에 불과할 것이고, 또는 그 역으로 헌정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헌법이 규범으로 역할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헌정질서의 작동상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단계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헌법전의 규정들에 문제가 있는지, 둘째는 헌법전의 규정이 실질적인 규범으로 작동하는지, 셋째는 주권자들이 헌법의 규범구조를 이해하고 이에 따른 헌정질서에서 주체로 서 있는지가 그것이다. 이를 현행 헌법을 기준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현행 헌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법학은 물론 제 학문분야의 선행연구들이 방대하다. 이를 일일이 검토하는 것은 본 글의 주제도 아니고 책무도 아니지만, 헌정질서의 측면에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첫째, 규정들 자체에서도 상당한 문제들이 보인다. 개인적 관심사로만 한정하더라도, 영토조항과 평화통일조항을 병립시킨 모순적 태도, 특정한 집단에 대한 기본권의 과도한 제한, 장기적 관점에서 변화 가능한 헌법현실을 적용하지 못하는 폐쇄적 구조,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국가기구규정, 사적소유권을 절대화하면서 제 권리를 이에 맞추고 있는 허울뿐인 경제민주화규정 등 현행 헌법은 자체적인 모순구조를 담고 있다. 헌법이 가진 특수성에 비추어 개별적 사안의 일체를 담을 수 없고, 원리와 원칙을 제시한 후 개별 사안을 법률에 유보하는 형식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모순적 구조는 혁파의 대상이다.
다음으로 헌법전의 각 규정들이 실체적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역시 의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헌법 제1조이다. 헌법 제1조는 제1항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 규정은 3·1혁명으로 건설된 임시정부의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 이래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는 규정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양대 원리를 국체로 선언한 이 규정의 실질이 현실에서 규범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지속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주권자들은 유혈의 저항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이 규정이 규범력을 온전히 행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의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숱한 사건들을 검토하면 헌정질서에 대한 내부충격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기반으로부터 형해화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를 유지 보전하여야 할 책무를 지고 출범한 정부가 도리어 이 국체를 근간으로부터 뒤흔드는 작태를 자행한 상황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규범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워진다. 외부충격의 측면으로 보더라도 IMF 사태 이후 약 10년이 흐른 뒤 발생했던 2008년 금융위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헌정질서는 그 실체를 의심받았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이념은 흐려졌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의 선언이 항구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상이자 과정이라고 전제할지라도, 이 조항의 규범력이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배척되는 현상은 헌정질서가 작동되는 사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한편 같은 조 제2항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같은 조 제1항과 마찬가지로 이 규정이 규범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할 때 부정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국가기구에 부여된 권한은 주권자가 해당 기구에 필요한 범위에 한정하여 위임한 권력일 뿐이다. 그러나 국가기구의 전횡을 주권자가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능, 예컨대 3권분립의 원리는 그다지 확고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 사안이 정치적 과정을 통해 해소되지 못한 채 헌법재판소 등 사법기구를 통해 법리적 및 절차적으로 해소되는 양상이 늘어가면서 정치과정에서 주권자가 배제됨에 따라 권력의 사용이 권한의 위임범위에 따른 것이 아닌 법률의 해석에 따른 것으로 한정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국가기구는 제1조 제2항에 의거하여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일부 권력의 행사에 대하여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행사가 주권의 범위를 초월하는지 여부를 사법부로부터 판단 받으면 되는, 다시 말해 사법부가 권력행사의 한계를 법리적으로 해석하여 용인해주면 어떤 권력행사도 가능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주권자의 판단은 부수적 효과로 밀려나게 되며, 이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 수많은 주권자들이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가야 한다.
IMF 사태 전 기간은 물론 그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사유재산의 내용과 행사의 한계를 규정한 헌법 제23조의 규정들은 그다지 규범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소위 경제민주화조항으로 잘 알려진 제119조 제2항은 허울만 남은 채 주권자로 하여금 그 작동의 실체를 느끼게 할 어떠한 규범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권자가 헌정질서의 주체로 서 있는지를 보자. 물론 여기서 모든 주권자 즉 국민에게 민주공화국의 이념이나 주권의 원리 혹은 기본권의 원칙과 국가기구구성의 원리 및 기타 헌법의 각종 규정들의 함의를 이해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법철학적 내지 정치철학적 전문성을 가질 수도 없으며, 주권자들에게 이러한 소양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당한 요구이자 폭력이다. 흔히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갖는다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정부를 비롯한 국가기구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알리바이용일 가능성이 농후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권자들이 헌정질서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보장하고, 학습과 토론의 장이 열리도록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며, 더 나가 헌정질서의 유지 발전을 위해 주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상충하는 이해관계와 경쟁하며 그 가운데서 일정한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정치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의 형성은 과거에도 드물었으며 현재도 그다지 가능성이 없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6년의 국회개헌특위는 논의과정의 공개여부를 두고 대립하다가 결국 제 권위도 찾지 못한 채 파행으로 끝났다.
이처럼 세 가지 기준으로 검토할 때, IMF 사태가 우리의 헌정질서를 교란한 외부충격인 동시에 우리 헌정질서에 내재된 불안정성 또한 IMF 사태를 유발한 요인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헌정질서를 구성하는 원리와 원칙에 대한 이해와 이를 유지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의 합치가 사회적 합의로 성취되지 않은 상태임을 지적해야 한다.
헌정질서의 유지 발전은 누구라도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일체의 이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과 대립을 보장하되 갈등을 최소화하고 민주공화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모색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색이 결여된 채 갈등을 증폭하거나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작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확인했듯이 우리 사회의 갈등은 여전히 팽배하고 그 골이 깊으며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IMF 사태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념적 성향에 따라 극단적인 이해가 대립하고 있다. 어떤 입장에서는 IMF 사태가 한국의 경제구조를 개선하는 진통의 역할을 했다고 보지만 다른 입장에서는 이것이 한국에서 부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 기제로 판단한다. 한편에서는 IMF 사태 최대의 희생자로 노동자들을 떠올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IMF 사태를 불러온 요인 중 하나로 노동자들을 부각시킨다. 전문가와 관료들이 제공하는 각종 정보들이 이렇게 대립하는 가운데 주권자들의 생각도 충분히 갈릴 수 있다. 생각의 다름이 때론 경쟁으로 때론 갈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쟁과 갈등을 발전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우리 사회에 그리 충분치 않으며, 그 결과 헌정질서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에서 헤매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IMF 사태라는 거대한 외부충격으로부터 지켜야 할 헌정질서, 또는 이러한 외부충격으로부터 사회를 지켜낼 수 있는 헌정질서에 대해 주권자의 이해와 합의가 없이는 IMF가 설정한 의제를 따라가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IMF 사태를 관리하는 입장에서 출발한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IMF 사태 이후 와해된 점 역시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아 범사회적 합의체 구성을 통해 이를 극복하자는 취지는 무조건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노동계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재벌개혁’과 ‘노동시장유연화’가 진척된다. 형식적으로는 사회의 각 이해집단이 함께 참여했고, 상호 논의와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일정한 합의를 도출해냄으로써 헌정질서의 작동이 건강하게 이루어지는 사례를 만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외부충격을 유발한 IMF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행보를 맞춘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제도개선 등 정책시행은 노동에게 불리한 편향적 구조조정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고착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기껏 구성된 ‘노사정위원회’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기실 노사정위원회는 자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노동자가 스스로 불이익을 감당하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정부의 책임을 면하는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기구가 되었고, 이에 따라 1999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게 된다.
IMF 사태의 경우, 이러한 외부충격에 따른 헌정질서의 교란을 개별국가의 주권자가 개선한다는 것은 얼핏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검토한 것처럼 헌정질서의 작동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세 가지 사항으로 미루어볼 때, 헌정질서의 건강함은 최선의 상태를 만드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라고 판단된다. 국민의 정부가 조성했던 사회적 합의기구가 전례의 축적 위에 구성되었다면, 즉 헌정질서를 건강하게 하는 주권자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참여가 이전에 충분하였고, 혹은 바로 그러한 토대에서 87년 헌법이 만들어지고 그에 다른 헌정질서가 구현되었다면 그 구성과 진행방향 및 내용과 결과는 당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외부충격이 헌정질서에 끼치는 영향은 내부충격이 미치는 것과 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며, 헌정질서의 교란에 대한 대응과 대안 역시 외부충격과 내부충격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판단된다.
- 어떻게 헌정질서를 구축할 것인가?
IMF 사태는 외부에서 강제된 충격이 취약한 헌정질서에 편승할 때 사회를 어떤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건강한 헌정질서는 내외의 충격에 강한 내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헌정질서는 그러한 헌정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의 노력을 유발할 수 있다. 주권자가 의지를 가지고 수호하려는 헌정질서는 바로 그 헌정질서를 통해 주권자들을 보호하고 주권자에게 평화와 안녕을 제공할 수 있다. 주권자가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고, 일상을 정치로 전환하며 정치적 쟁투와 타협을 통해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한 헌정질서를 만들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할 때 국가권력과 대립하는 시민권력을 형성할 수 있으며, 대의기구가 빠지기 쉬운 통치논리를 극복하면서 IMF 사태와 같은 외부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헌정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광장으로부터 촉발된 헌법 개정 논의는 신중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개헌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헌법의 명문 규정 중 어떤 것이 빠지고 어떤 것이 들어가느냐 보다, 개헌이 일어났다는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된다. 개헌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기존의 헌법이 규율하고 있던 국가체계가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변화를 겪었거나 그에 상당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명문의 규정이 어떻게 바뀌는가의 문제는 이 사건이 터지는 과정이 있을 때에야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기왕에 논의되고 있는 개헌을 통하여 내구성을 갖춘 건강한 헌정질서를 창설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진행되고 있는 헌법 개정 논의는 헌정질서의 재구성을 목표로 한다는 취지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주권자의 참여가 배제된 채 헌법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국회 개헌특위가 헌법개정안의 초안을 작성하여 전국순회토론회를 진행했지만, 기실 이 토론회는 요식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13개 광역시도를 돌면서 ‘국민대토론회’를 진행했으나 주권자가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면서 다른 안을 숙의하는 과정은 없었다. 초안의 설명이 있은 후 전문가의 견해를 듣고 몇몇 청중의 질의응답 또는 간단한 의견청취로 끝나는 구조로는 주권자가 직접 헌법을 만들고 헌정질서를 구성한다는 취지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
다음으로 현재 헌법 개정 논의가 헌법 개정을 통하여 청산되어야 할 주체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 개정이 대선 주요 후보들의 공약으로 제출되고,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것은 촛불광장의 힘 때문이었다. 그런데 광장에 모인 촛불은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의 한계를 지적했으며, 이들 역시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럼에도 청산의 대상들이 개헌을 주도할 때, 촛불이 요구한 개혁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신뢰하기 어렵다. 특히 이들의 관심은 여전히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구성의 방식에 쏠려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개헌논의가 결국 자파세력의 집권가능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춘 채 촛불의 요구는 부차화시키는 ‘최소주의적 개정’으로 끝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청산의 대상들이 주도하는 개헌을 통해 헌정질서의 재구성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추진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기한을 한정하여 이루어지는 개헌 논의로 인해 주권자가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은 협소해진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전국 동시지방선거와 함께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누차 밝혀왔다. 이처럼 한정된 시간을 두고 개헌을 추진하게 되면, 87년 헌법을 논의했던 상황과 유사하게 신속성과 효율성에 급급하여 정치 엘리트와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개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주권자들은 이 속도를 따라갈 시공간을 확보할 수 없게 되어 배제된다. 본문에서 살폈듯이, 주권자들에 의해 합의되고 승인되지 않은 헌정질서는 내구성을 갖추지 못하게 됨에 따라 내부충격과 외부충격에 취약하게 된다. 개헌으로 헌법의 내용을 잘 다듬어야 한다는 것은 부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말을 더 보태야 할 부분은 헌정질서를 구축하는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주권자들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규정의 규범적 작동이 어떤 효과를 자신들에게 부여하는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공론의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는 추후의 여러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었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이미 지난 촛불광장을 통해 체험한 바 있다. 최초 촛불광장이 시작되었을 때, 광장에 모인 촛불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유일한 합의지점은 박근혜 퇴진이었다. 그 외의 의제에 대해 각인각색의 입장과 견해가 있었고, 그에 따른 반목과 대립이 존재했다. 노동계와 재벌에 대한이 역시 갈리고 있었고, 청소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그동안 배제되고 차별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정도 역시 각양각색이었다. 초기 집회에서 ‘이재용을 처벌하라’는 구호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상균을 석방하라’는 구호에 여기서 왜 그런 구호를 하느냐며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소수자들에 대한 비하적 발언은 수시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사안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안이 아니라 하나로 엮인 이 사회의 고질적 병폐의 교차하는 단면들임을 깨닫게 된 촛불들은 약간은 개사된 민중가요를 불렀고, 재벌도 공범이라고 외쳤으며, 양심수 석방에 목청을 높였고, 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들을 서로 견제했다. 광장의 촛불들은 참여를 통해 연대를 경험했고 연대를 통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실질을 체감했다. 거기에 어떤 이론적 교육이나 체계적 학습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촛불은 함께 성장했다. 공론의 장이 마련된다면, 주권자들은 얼마든지 주권자로서 각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취하게 된다.
헌법과 헌정체계, 헌정질서에 대한 오해와 왜곡은 여전히 상존한다. 예컨대 최근 벌어진 촛불정국 과정에서 헌법 및 헌정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민심도 헌법 아래 있다 … 헌법에 어긋나는 주권도 없다. 민주주의도 헌법 아래에 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 입장에 따르게 되면 4·19 혁명, 광주민주항쟁,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최근의 탄핵촛불은 모조리 헌정질서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 된다. 이 견해는 전형적인 헌법물신주의를 보여준다. 이러한 입장에 대응하여 헌법을 만드는 주체가 민심이며, 헌법을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주권이고, 민주주의의는 헌법구성의 원리일 뿐 규범체제 안에 안주해야 할 도구가 아니라는 점을 개헌 과정에서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