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정치·사람 정치경제 세미나 1~2주 후기>

과학적 사회과학으로 과학적 대안과 실천을

 

임정빈_ 세미나 참가자 / 노동·정치·사람 회원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 최윤식의 방주에 탄지 12일이 지났다. 총 10강으로 기획된 이 세미나는 현재 2강까지 진행되었고 3강을 앞두고 있다. 강의의 전반적인 입문과 관점을 들은 지금, 이 세미나의 의의를 짚어보고 싶다.

86세계관을 비판한다는 이 세미나는 86세대를 비판한다는 기존의 세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켰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86문화의 문제는 오로지 86세대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관을 향한 비판을,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과학철학을 통해 정교하게 했다. 한국 사회의 방향성을 다시 묻기 위해 이전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방법으로써,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세대와 진영의 문제를 세계관의 문제로 바라보다

세미나에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86이 문제다’, ‘진영논리가 문제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을 세계관의 문제로 짚어내고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였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결정론적 사고관과 민주당의 진영논리를 읽어낸 것은 탁월하다. “모든 새로운 것은 승리한다”며 필연적 승리를 믿던 변증법적 유물론이 제대로 비판되지 않고 소비에트 붕괴 후에도 서양에서 수입된 포스트 담론들과 세계관적으로 공존해왔다는 것은 86세계관의 문제를 정교하게 분석했다고 할 만하다.

정치경제 세미나 발표 중인 최윤식 박사

소비에트가 몰락하기에 앞서 서구에서는 68혁명으로부터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비판되었지만 한국은 그 영향에서 비껴났다. 그 당시 엄혹한 군부독재 하에 한국에는 이렇다 할 만한 구좌파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소비에트의 몰락은 한국의 운동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민주당으로 이동한 정치인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단선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은 남아있었다. 그렇게 ‘우리 편은 무조건 옳은 정치’, 진영논리는 주류 정치와 융합되었다. 민주/반민주 구도는 이름만 바뀐 채 ‘진보’/‘보수’ 구도가 되었고 한국의 좌파들은 거대양당 구도에서 주변화되고 기생정당화되었다. 이는 선거 때가 되면 민주당을 향한 ‘비판적 지지’로도 나타났다. 민주당이 진보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필자로서는 현실적으로 진보/보수가 되어버렸다는 분석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결정론적 세계관의 진영정치,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68혁명

비판은 68혁명 이후의 신좌파들에게도 향한다. 이들의 운동은 대공장-대량생산시스템의 위계와 획일성에 대한 거부였으며 여성권/성소수자 권리/반인종주의 등으로 나타났지만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는 아니었고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면서 포섭됐다는 것이다. 세미나에서 구체적인 예를 든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자본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는 대신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등을 늘리는 성주류화 전략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운동들이 반자본으로 포함되지 않는 대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 포섭됐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도 책임이 있는데 “노동계급은 하나다”라는 추상적인 구호를 현실의 다양한 사람들을 향해 염불처럼 외면서 정작 강력한 정치세력화로 묶어내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사고관 아래, 분명 패배했는데도 ‘혁명적 낙관주의’에 따라 내리곤 했던 ‘승리적 평가’의 정체는 결국 공감을 얻지 못한 정신승리였다. 또한 그 지속은 현실에서의 더 큰 패배로 이어진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초라한 성적표가 현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다. 2022년 6월 1일 지방선거가 끝난 지금, 방주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 더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과학적 실천과 대안을 향한 비판적 실재론

이 세미나의 방법론으로 채택된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과학적 실천을 재고하게 한다. 그러나 탈근대론과는 방향성이 다르다. 탈근대론의, 인간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회의는 반이성/반과학으로 이어졌고 우리에게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과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이 과학을 이용하는 것이 문제였음에도 잘못된 질문을 한 결과였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분리하는 반(反)자연주의는 ‘자연과학’을 대가로 ‘사회과학’을 사려고 했으나 과학의 기초에 대한 중심을 잃어버릴 뿐이었다. 비판적 실재론의 비판적 자연주의는 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 방법은 달라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일 수 있음을 치밀하게 논증하여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을 재해석하고 과학적 실천과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물론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을 내놓는 것은 실천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론가와 실천가의 관계는 이론가는 구조 분석 등을 위한 단서로써의 이론을 제공하고 실천가는 그러한 이론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현실과 현장 접근성 등의 경험에서 대안과 실천을 찾는 것이라는 관계 설정은 이론가와 실천가 사이의 오해와 반목을 불식시키는데도 일조한다. 이론가는 지령을 내리고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실천가도 이론가의 연구 등으로부터 이론적 지식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운동과 학계가 따로 노는 장면들이 많았던 것은 변혁적 전망이 사라진 것과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도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필자의 해석과 요약이 세미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 글이 부족한 것도 많을 것이다. 필자는 세미나를 향한 흥미를 조금이라도 일으켰다면 그걸로 족한다. 한국 사회의 위기 앞에서, 운동의 위기 앞에서, ‘진보’의 위기 앞에서 노동, 정치, 사람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세미나가 이어지길 바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