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정책팀장, 노동당 당원, 노동·정치·사람 회원
도시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대개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말로 이야기된다. 사실 도시의 형성 자체가 누군가의 생존을 이익으로 전환하면서 이루어졌다.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그러니까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자유로운 노동의 발명은 도시로의 계급적 이동에 의해 형성되었고 이는 한국의 도시라고 다르지 않다. 특히 발전주의적 독재 체계에서 한국전쟁으로 강제적 해체를 겪은 한국의 도시는 압축 성장이라는 독특한 팽창을 경험했다.
자본의 운동으로서 도시개발
60~70년에는 국가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도시의 성장을 이끌었다면 80년대 중반부터는 국가가 후원이란 이름 아래 민간자본의 폭력적인 개입을 지원하면서 도시가 성장했다. 소위 ‘합동재개발’이라는 개발 방식은 그전까지 국가가 독점했던 도시개발에 대한 권한을 민간, 더 정확하게는 자본에 위임했다. 이 위임과정에서 독특한 점은 서구에서는 민간개발에 지속적인 규칙을 부여하면서 제도화되었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국가가 가지고 있던 공권력을 민간에게 부여하면서 제도화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국가의 수용권을 민간에게 그대로 이양한 것이다. 51%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나머지 49%의 토지와 건물을 민간이 강제적 뺏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은 폭력적인 도시의 개조과정을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 조세희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묘사하는 도시의 ‘달동네’ 상황은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의 철거민이 한강물로 뛰어든 지금까지도 지독하게 반복되는 도시의 문제를 보여준다. 우린 때때로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는 이유로 한국의 도시개발 정책이 가진 전근대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어떤 형태든 현대 도시의 발전과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도시문제를 보려면 다양한 나라에서의 차이보다는 동일함에 주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말이 가진 한계, 그러니까 그나마 괜찮은 개발이라는 대안의 자기 한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현실적인 대안에서 근본적인 대안으로의 비약 혹은 도약을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는 노동력을 판매할 노동의 공급처이자 자본의 순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소비의 집단적 장소다. 이 말은 도시개발이 지속적으로 야기하는 생존권의 문제가 곧 자본의 순환과정에서 나타나는 원인이자 결과임을 의미한다. 이런 이중적인 속성은 당연히 도시의 성장이 계급의 한 측을 지속적으로 빈곤 상태에 몰아넣는 것이 부수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과정임을 생각하게 한다. 생존권의 문제는 자본주의적 도시화의 과정에서 분리할 수 없는 과정인 셈이다.
생존권과 젠트리피케이션의 ‘트레이드 오프’
왜 빈곤화가 도시개발의 필연적인 과정일까. 그것은 도시의 성장이 강제적인 부의 이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에 대해 도시재생 정책의 당사자의 입에서 “차라리 젠트리피케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지역의 주민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나,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면서 세계화 전도사를 자처했던 연세대 모종린이 ‘젠트리피케이션은 저평가된 지역상권의 정상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할 때, 이는 매우 정확한 이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의 순환이라는 과정에서 보면,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의 한 지역에 지속적인 자본 집중이 발생하는 것이고 집중된 자본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숨가쁜 순환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소위 ‘뜨는 상권’의 속성이다.
과거에는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상권이 만들어졌다면 2010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의도된 상권이 만들어졌다. 특히 이명박 전 시장에 의해 진행된 청계천개발사업은 지방정부의 도시정책이 도시의 자본 집중에 적극적인 효과를 내는 전형이 되었다. 이후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서울사업과 더불어 박원순 시장으로 이어진 공공개발과정은 모두 젠트리피케이션을 의도했다. 서울숲이 성수지역을, 경의선숲길이 마포구 일대의 민간 도시개발을 유도했다. 그리고 공공개발에 의한 상업지역의 확산은 곧 주거지역의 개발로 이어진다. 2004년부터 지정된 뉴타운지역이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주춤하다가 2016~2017년 상업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이 논란된 이후부터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부수적 과정이 아니라 사실은 내재적 목표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빈곤이 만들어진다
서울지역의 저소득층 주거환경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이들이 장기화된 도시개발 사업지에 집단적으로 거주한다는 점이다. 2004년부터 지정되기 시작한 도시개발 지역은 이미 보상비를 사업의 비용에서 떼어낸 지 오래다. 현행 법제에 따르면 세입자의 보상은 ‘정비구역 지역고시일’ 3개월 전에 이주한 대상에게만 지급하는데, 사업추진 자체가 10년을 넘긴 시점에서는 이런 기준을 충족하는 대상이 없다. 하지만 이런 지역으로 이주하는 대개가 보상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주를 하는데, 이는 서울지역의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거주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결국 사업이 장기화되는 구역은 주거환경이 의도적으로 낙후되는데(주택개량이나 기반시설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이 ‘덕분’에 상대적으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계층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임대료 수입을 얻어가는 가옥주들은 사업추진이 진행되더라도 보상비 부담이 전혀 없다. 정비계획이 확정되어도 당장 철거가 불필요한 지역까지 철거를 강행한다. 상식적으로는 세입자를 들여서 마지막까지 임대료 수입을 얻는 것이 나아 보이지만 그러지 않는다.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토지나 주택은 재산세나 토지보유세를 징수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터를 만들어 놓아도 소유자에겐 부담이 되지 않는다.
도시의 빈곤이 깊어질수록 도시개발의 낙차를 크게 키울 수 있다(비용은 적게 이익은 높게). 이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추진하는 것이 더욱 이익인 사업구조 탓이다. 그리고 이런 사업구조는 전적으로 소유자에게 유리한 구조다. 100년을 한자리에 살았다 하더라도 소유자가 아니면 금세 주민성이 뽑혀나가지만, 그곳에 단 1일도 살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매매계약서상 소유자라면 바로 불가침한 주민성이 발생한다. 이런 틈새에서 도시의 빈곤은 커져 간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반드시 ‘빈곤’을 필요로 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