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2017년 9월 7일 전주에서 진행된 “민주주의와 인권” 연속강좌에서 강연한 자료입니다.

민주시민과 정치참여

윤 현 식(노동정치연구소(준) 책임연구원)

들어가며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같은 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주인이라는 언명이다. 주권은 국가나 권력자의 시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으로 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일 수 있다. 만일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 않고 어떤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일 수가 없다. 이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국가의 주인으로 대접받고 있는가? 또는 국가의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는가?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전국 곳곳의 거리와 광장은 촛불로 밝혀졌다. 불의한 권력의 국정농단에 맞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연인원 1천 7백만의 사람들이 적폐의 청산과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요구하며 촛불을 들었다. 그 결과 초유의 탄핵심판을 거치면서 구 정권은 물러났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다. 주권자의 의지가 정치적으로 관철되었고,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저력을 새삼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써 주권자의 역할은 완료되었고, 민주주의는 회복되었는가?

촛불혁명이라고까지 칭송받는 2016-7년의 촛불정국에서 확인된 가장 장엄한 쾌거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며, 몰락 직전의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힘은 무엇인지를 확인했다는 것이 촛불정국의 성과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민의 정치불신과 탈정치에 의해 촉발되며, 민주주의의 회복은 시민의 정치참여와 행동을 통해 가능해짐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를 죽이고 살리는 것 모두 시민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에 대한 이념적 지향이 현실에서 실현되느냐의 여부는 주권자인 국민, 촛불을 든 시민의 행동 여하에 좌우된다.

그 관계와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헌법 제1조 제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학술적인 측면에서 다룬다는 것은 오늘 이야기의 범위를 벗어난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역사, 개념 규정, 의의, 전망 등을 총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다루는 것은 지양한다. 다만,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핵심적인 성격만을 간단히 보고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자.

민주주의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자기지배의 원리를 의미한다. 나 자신이 통치자이자 피치자이다. “자기 스스로를 지배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이다. 지배자는 나 자신이다. 그럼 나는 누구를 지배하는가? 지배받는 존재 역시 나 자신이다. 지배하면서 지배당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역설이다.

우리 헌법을 보면 전문에 현행헌법의 개정배경과 취지에 대하여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고 밝힌다. 헌법은 주권자가 국가를 설계한 문서이다. 그 문서를 “대한국민”이 만들었다. 따라서 대한국민인 나는 대한민국을 설계한 당사자가 된다. 국민이 국가의 설계를 담당하므로, 당연히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므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스스로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보호받기 위해 국가기구를 설치한다. 그 국가기구는 주권자로부터 일정한 범위의 권력을 이양 받아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책무를 진다. 여기까지는 주권자가 지배자로서의 위치에 서 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지배자는 자신이 만든 헌법과 그 헌법에 의해 설계된 국가의 운영원리에 종속된다. 비록 주권 전체가 아니라 권력의 일부를 할양받은 국가기관은 그 권한을 행사하여 주권자인 국민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과하고 강제한다. 합법성과 정당성, 거기에 정통성을 가진 국가기관의 권한행사를 국민은 수용하고 따른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결했을 경우, 주권자의 자기지배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공화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통상 공화정은 전제정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전적 이해에 따르면 공화주의는 군주와 같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민의 자기지배를 뜻한다. 공화주의의 이념적 핵심은 공동체가 특정한 계급 · 계층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더욱 단순하게 말하자면, 공화주의는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동등한 지위와 자유로운 참여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회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에 대한 일정한 합의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이해와 견해가 다르며, 추구하는 정의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의 이상적인 가치가 현실에 발현하려면 실제로 그 사회 구성원 전체가 같은 이상과 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공화주의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은 공동체의 표준적 가치를 어떻게 형성하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정치투쟁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은 그래서 완성된 형태의 국가체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권자들이 만들어 나가고 언젠가는 만들어야 할 이상을 선언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누가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가?

시민의식과 참여

현행 헌법에서 주권자로 규정되어 있는 ‘국민’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촛불을 들고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근대 시민혁명의 주체였던 시민은 다분히 특정한 계급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즉, 근대에 들어와 군주와 귀족이 주권자였던 구체제(Ancien Régime)를 전복하고, 새로운 주권자로 등장했던 신흥 부르주아지를 시민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시민이라고 함은 특정 계급 또는 계층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공동의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인 주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시민은 그 범주와 틀에서 국민과 큰 차이를 가지지 않으며, 적극적인 의사표현과 정치참여에 임하는 행동주체로 이해된다.

여기서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의회용어사전에 따르면 시민의식은 “정치공동체의 유지 · 발전을 위하여 구성원이 가져야 할 권리 · 의무에 관한 의식”이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시민정신’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의회용어사전은 “자발성과 참여성을 근본으로 하여 사회의 발전·유지를 위한 책임의식을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지역사회 나아가서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 인식과 그것을 자발적 참여를 통해 해결해 보려는 주인의식, 책임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시민은 이러한 의식 내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주체로 상정된다. 다시 말해 시민은 정치공동체의 현상과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개입하고 참여하려는 자세와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시민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하고, 자신이 발을 두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비판하고 개입하는 것이 바로 참여다. 민주공화국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시민이 주체가 되어 참여할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한때 ‘참여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를 ‘참여정부’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그 원리상 ‘민’의 참여가 없으면 작동되지 않는다. ‘인민’이 주인인 시스템에서 그 주인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그 말 자체에 참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참여 민주주의’라는 말은 ‘민주 민주주의’ 혹은 ‘참여 참여주의’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대의 상황이나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참여 민주주의’라는 말은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개념상으로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원리를 잊지 말자는 목적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한 민주주의의 현실에 참여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정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의 작동과 참여의 문제는 매우 심상찮은 상황에 직면해 있음이 드러난다.

정치와 참여

‘정치’의 공간에 한정하여 참여를 검토해보자. 먼저 정치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개념을 정의한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가치의 권위적 배분(David Easton)”이 정치에 대한 가장 간명한 규정일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정치란 “사회적 자원과 지위의 획득과 이를 위한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 규정은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는 정치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넓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의 범위가 지나치게 산만해질 수 있다. 범주를 좁히기 위해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Max Weber)”으로 한정해보자. 통상 우리가 정치라고 이야기하는 범주에 적합한 규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만으로는 정치의 역동성을 인식하는 데는 불충분하다. 가치의 배분과정으로 보면, 당연히 사회적 자원과 지위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적 자원과 지위에 대한 이해관계는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천양지차의 관점과 이해가 존재하는 가운데에서 의사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범주를 국정에 관여하는 수준으로 좁히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국가의 운영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구든 자신의 이해관계와 목적의식에 부합하도록 국가의 운영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이 때도 역시, “영향을 미치는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여기서 각도를 달리하여 정치에 대한 다른 개념정리를 살펴보자. 정치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당사자 간의 투쟁인 동시에, 그 투쟁이 내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어장치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즉, “투쟁인 동시에 투쟁의 제한(Maurice Duverger)”이라는 개념으로 정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해를 달리하는 당사자 간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여 다른 한쪽을 소멸시키고자 할 때는 이미 정치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처럼 다른 쪽의 절멸을 원하는 투쟁행위는 전쟁이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유혈을 피하는 일종의 규칙으로서 정치는 작동한다. 이해관계를 놓고 때로는 갈등하고 투쟁하지만, 때로는 협상하고 타협한다. 승자와 패자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지만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정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치는 “사회적 자원과 지위라는 가치를 배분하기 위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여,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적절한 이해를 형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장황한 개념 규정이거나 상기한 몇 가지 개념규정 중 어떤 것을 따를 지라도 정치는 ‘개입과 참여’라는 주체의 행위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러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선거다. 우리 헌정질서가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민주주의의 방식은 간접민주주의제도, 즉 대의제도이다. 주권자가 스스로 대표를 선출하여 그 대표로 하여금 국정을 수행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다. 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이 선거이며, 우리는 선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 대의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비록 우리 손으로 대표자를 뽑는다고 하더라도, 그 대표자가 나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대리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의 입장을 개별적으로 대리하지도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 대표들이 주권자로부터 일정한 정도의 권력만을 이양받았음에도 국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고픈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때 ‘국정농단’과 같은 폐단이 발생하며, 그로 인하여 이들을 대표자로 선출한 우리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이러한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치참여 방식이 동원된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언론에 투고를 하거나 제보를 하는 등을 통해 잘못된 상태를 비판하거나 바람직하나 방향을 제시한다. 이러한 여론 형성을 통해 대표자들은 정책을 구상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 또는 사회단체나 정당 활동을 통하여 보다 직접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방식이 있다. 구성의 목적과 방식의 차이가 있으며, 정치적 책임을 지는 방법이 다르지만, 사회단체나 정당 활동은 대표자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참여함으로써 당사자의 입장을 확실하게 제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직접행동을 할 수도 있다. 1950년의 4·19 민주항쟁, 1987년의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 2008년의 촛불항쟁과 2016-7년의 촛불항쟁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를 들면서 대의제를 폐기하고 직접민주제로 전환하자는 비약은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대의제의 작동불능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때 주권자는 언제든지 직접행동을 통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으며, 우리의 역사는 중요한 정치적 분기점마다 그러한 직접행동을 통해 고장난 민주주의를 재가동 시킬 수 있었다.

참여의 효과

개인의 각성

참여의 주체는 궁극적으로는 개인이다. 어떤 의견을 가진 개인이 자신과 유사한 의견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규합하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그 의견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장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참여를 할 수 있는 개인적 소양은 어떤 것일까?

합리주의적 개인은 스스로 학습하고, 실천하며, 평가하고, 반성하며, 계획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적 인간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개인은 스스로를 발전시키면서 올바름과 그렇지 않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언제든지 타인과 때로는 대립하고 투쟁하지만, 때로는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홀로 독립할 수 있게 되는 동시에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 이 때 비로소 개인은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긍지, 자존감을 가지게 된다. 동시에 타인을 존중하면서 그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며, 자신과 타인의 삶의 조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개인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삶의 기준을 외부의 권위와 힘으로부터 찾지 않고, 자신의 긍지를 지키는 것을 당연하고 정의로우며 행복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개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찮고 사사로운 것에 자신의 자존심을 팽개치지 않는 고고한 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지 않은 개인은 자신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외부에 의탁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외부에서 자긍심과 자존심을 보완할 대체제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대체제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권력과 돈이다. 이들은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에 기대어 호가호위하면서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한다. 권력과 돈의 향방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린다. 한편 이들은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부하고 돈을 바치고 알량한 권세에 기대는 사람들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한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돈과 권력에 기대 타인을 억압하고, 불의한 짓을 하게 된다.

스스로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공동체의 가치관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행동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세파에 휩쓸리면서 공동체의 가치관을 흐트러트리고, 관계를 파괴한다. 전자는 민주주의의 작동을 건전하게 만드는 시민정신의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다. 후자는 민주주의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다른 이의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민주적 결과를 양산하는 사람들이다.

전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전자와 같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일종의 모델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참여는 참여하는 개인은 물론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의 분위기를 통해 다른 개인에게 그 효과를 전달한다.

공동체의 형성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과 학습을 통해 발전하면서, 스스로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지게 된 개인의 참여는 사회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전형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에서는 사회의 기본단위를 개인으로 본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싹텄고, 시민혁명의 바탕이 되어 봉건체제를 일소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을 사회의 최소단위로 보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관점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각성된 개인만을 전제할 경우에는 오로지 개인이 알아서 잘 하면 된다는 논리로 흐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논하기 위하여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사회이다.

사회는 단지 개인이 확장된 형태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내가 태어나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어느 사회의 구성원이었다. 물론 자신이 속한 사회는 물론 국가까지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추후에 변경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사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홀로 선 개인의 입장만으로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를 이해하는 또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관계’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나 인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민주주의나 인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삶을 영위한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이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그런데 개인만을 놓고 볼 때는 각자의 정의와 가치관이 중요하지만, 사회라는 틀을 놓고 볼 때는 각자의 정의와 가치관이 언제든 충돌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겨울의 거리와 광장에서 우리는 촛불을 든 거대한 행렬의 반대편에 태극기를 흔드는 또 다른 일군의 사람들을 보았다. 촛불은 막장으로 치닫는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지만, 태극기는 구국의 일념으로 정권의 사수를 요구했다.

태극기를 흔드는 집단에 속해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아직 신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위 ‘적폐’의 기준 자체가 달랐고, 사회가 처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도 달랐다. 그들의 정의는 우리와 달랐고, 앞으로도 그 간극이 쉽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바로 이들이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배제하고 축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태극기 부대’가 가지고 있는 반민주적 반인권적 견해를 수용할 수도 없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를 말소할 수도 없다.

촛불도 참여의 방식이었고 태극기도 참여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촛불광장은 ‘태극기 부대’의 불합리와 부정의를 견뎌냈고, 촛불의 열망을 사회의 보편적 의지로 승화시켰다. 어떤 참여의 행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어떤 참여의 행동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가장 단순하게 평가하자면, 참여의 규모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태극기 부대’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생각되겠지만, 현장에서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참여의 규모는 촛불 쪽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곤란하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점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참여가 가능했느냐이다. 그것은 참여의 내용과 질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촛불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지가 어디에 근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적폐’의 청산이라는 가치가 분명했으며, 그 ‘적폐’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를 확연하게 드러냈고, ‘적폐’ 청산 이후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반면 ‘태극기 부대’는 추상적인 형태의 국익이나 안보를 이야기했을 뿐, 정권을 지켜야만 하는 당위를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촛불은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했지만, 태극기 부대는 사회적 보편성의 획득에 실패했다.

지금도 헌법재판소 앞, 서초동 법원 앞, 국회 앞에는 여전히 태극기를 들고 구 정권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복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는 사회의 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반면, 사회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촛불의 참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적폐’의 청산과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효과는 입장을 달리하던 ‘태극기 부대’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며, 서서히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변화는 획기적인 것이다. 이처럼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는 단지 공간으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가치로서의 공동체로 거듭나게 된다. 공동의 가치관, 함께 지켜야 할 무엇에 대한 합의가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게 된다. 이 때 단지 ‘개인+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라, 관계를 고민하고 그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최악의 민주정치 vs 최선의 전제정치?

이제 국가로 넘어와 보자. 국가는 사회의 여러 종류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사회와 달리 국가는 성격상 판이한 차이를 가진다. 그 중 가장 큰 특징은 힘을 독점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 기구이다(Max Weber)”라는 정의는 이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한 기구이다. 국가는 이 강고한 힘을 치안을 유지하거나 내란을 저지하고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 통상 ‘국가’가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주체는 추상적인 ‘국가’가 아니라 주권자에 의하여 일부 권력을 이양 받은 정부이다. 현행 헌법의 각 조문은 “국가는 ~를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여기서 국가는 바로 정부를 의미한다. 헌법 제10조의 후단에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국가’는 추상적인 의무의 담지자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현존하는 정부인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체제, 공화주의 체제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최악의 민주주의와 최선의 전제정치가 우리 앞에 선택지로 주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체제를 택할 것인가? 세종대왕의 선정치하에 사는 것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구 정권이 집권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에서 사는 것이 행복할 것인가?

우리 역사에서도 최악의 민주주의 체제를 겪은 전례가 있다. 이승만 정권이 그랬고, 박정희 · 전두환의 군사정권이 그랬다. 이 정권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민주주의를 압살했지만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했고, 그 헌법을 근거로 집권했다. 우리 역사뿐만이 아니라 대표적으로 나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독일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유대인을 학살하고 유럽 전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지만 나치는 갈채를 받았다. 나치는 법을 통해 이러한 행위를 자행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최악의 민주주의와 최선의 군주주의는 기실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최악의 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최악의 민주주의 체제가 발흥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각성된 개인, 정의로운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성된 개인의 참여,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참여가 부족할 때 민주주의 체제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갈채는 열성적인 참여의 형태가 아니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 갈채야말로 가장 정치에 무관심한 행위, 즉 선동하는 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주권자로서의 소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최악의 정치적 무관심의 발로였다. 그것은 생각 없이 사는 죄악(Hannah Arendt)의 표본이었을 뿐이다.

참여는 민주주의 체제가 최악으로 전락하는 사태를 방지하는 최선의 예방책이다. 더불어 민주주의 체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구제하기 위한 최선의 구제책이기도 하다. ‘국가’ 더 정확히는 ‘정부’가 민주주의의 원리를 배신하고, 자의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면서, 종국에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로 빠지는 것은 시민이 정치를 외면하고 정치를 혐오하면서 정치에 대한 참여를 기피할 때 일어난다. 그 반대라면, ‘국가’는, ‘정부’는 주권자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기능하며 민주주의의 원리를 두렵게 반추하게 된다.

나가며

바이마르 헌법 제2

브레히트 詩 / 김남주 詩人 譯

1.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튼 어딘가로 가기는 가겠지?
경찰이 건물에서 줄줄이 나온다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튼 어딘가로 가기는 가겠지!

2.
보라 거대한 무리가 행진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행진하지?
그래 어디로 행진하는 거지?
아마 어딘가로 행진하기는 하겠지!
지금 국회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런데 돌아서 어디로?
그래 돌아서 어디로?
아마 돌아서 어딘가로는!

3.
갑자기 국가의 권력이 멈춘다
뭔가 나란히 서 있다
-무엇이지 그곳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이?
글쎄 뭔가 나란히 서 있기는 서 있다
그러자 갑자기 국가의 권력이 고함친다
고함친다 즉각 해산이다!
어째서 즉각 해산이지?
닥쳐 즉각 해산이다!

4.
그러나 뭔가는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왜? 그 뭔가가 말한다
왜 저놈이 왜라고 말하는가?
저런 놈이 왜라고 말해!
그리고 국가의 권력은 발포한다
그러자 뭔가 쓰러진다
도대체 뭐가 쓰러지지?
왜 금방 쓰러지는 거지?

5.
뭔가가 누워 있다 진흙탕투성이가 되어
진흙탕 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다!
무엇이, 무엇이 누워 있는가?
무엇인가가 누워 있다
그곳에 무엇인가 누워 있다 숨이 끊어진 채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국민!
진짜로 그것이 국민?
그렇다 진짜로 국민이다.

(해방시집1‘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남풍 刊. 1979년 발행)

브레히트의 이 시는 주권자의 무력함에 대한 한탄으로 얼룩져 있다. 또한 주권자를 배반한 권력의 만행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단지 문학작품으로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이 시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에 계속해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언제나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무관심은 국가권력의 부패와 농단, 자의적 권력의 행사를 유인한다. 권력의 만행은 결국 구성원 개인의 고통으로 전환된다.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혐오, 시민의 정치참여 기피는 민주주의의 유지와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브레히트가 절규했던 것처럼, 우리가 진흙탕 투성이가 되어 누워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16말-17년 초까지 우리 사회는 우리 스스로를 진흙탕으로부터 건져냈다.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각성했으며, 국가 권력에게 각인시켰다. 민주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실감했으며 광장에서 민주주의는 복원되었다. 물론 구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부터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흙탕 투성이가 되어 누워있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각성과 참여는 앞으로도 계속 풀어야 할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