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정치의 새로운 전망을 설계하자
– 6.13 지방선거 이후의 노동정치를 위한 제언
새로운 전망의 노동정치를 설계하자
1997년 이래 이어졌던 노동정치의 전형은 이번 6·13 지방선거로 종말을 고했다. 1997년 이래 추진되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 좌파적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출이라는 노동정치의 과제는 특단의 변화 없이는 달성이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번 선거에서 노동정치는 총체적 난맥을 보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진영은 노동정치의 방향에 대한 대안제시조차 하지 못했다. 정책협약 이상의 의미가 없는 ‘민주노총 후보’라는 수식에 머문 후보전술이 공허하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진보정당들조차 노동정치를 부각시키지 못했다. 노동당은 유효한 선거운동마저 진행하지 못했고, 민중당은 주요 거점지역에서 몰락했으며, 정의당 또한 노동정치의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소위 ‘진보벨트’라고 했던 노동자 밀집지역 중심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형해화 되었고, 대공장 조직노동자의 동원을 전제한 선거전술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가?
현실의 정치세력화를 고민하는 정당과 대중조직은 선거를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노동정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에 대한 대비가 어느 정도로 노동정치의 이해와 목적의식을 담보한 채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면밀한 평가가 필요하다.
노동정치는 그동안 현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수정치와 질적으로 차별되는 대안을 제시하는 독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노동정치가 필요하다는 당위만이 있었을 뿐, 조직노동의 참여를 당연한 조건처럼 전제하는 관성에 빠진 정치활동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대중은 더 이상 당위만으로 노동정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노동정치를 지지했을 때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대중에게 변화의 전망을 보여주고 그 실천경로로 안내하는 것이 노동정치의 역량이라면, 지금의 노동정치세력은 그 누구도 이러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정치의 현실화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정당과 조직은 스스로 변화하지 못했다. 노동정치를 이야기하는 정당 및 정치세력은 촛불로 등장한 중도보수정권과의 차별성을 들어내지 못했다. 노동정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유권자들에게 보수정당과 구분할 수 있는 변별지점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도보수는 언론으로부터 ‘진보’로 규정되었고, 노동정치를 갈망하는 세력은 그들과 유사한 ‘범진보’로 포섭되었다. 가뜩이나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한 상태에서 유권자들은 양자를 구별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이러한 틀 안에서 민주노총이 ‘민주노총 후보’ 명단을 발표하고 진보정당이 후보자를 내세웠지만, 노동정치 본연의 의미는 실종되고 오직 선거공학만 남게 되었다. 선거공학만 남은 상태는 대중들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하고, 기득권 보수정당들에게 경쟁력에서도 상대가 안 되었다.
노동정치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 집권 2년차에 돌입한 지금, 현 정부가 가지고 있는 노동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 논란이 된 최저임금 산입범위 입법화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보수정권과 보수정당은 현재의 시장자본주의체제를 구조적으로 변혁할 어떠한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보수정부의 한계는 더욱 빠른 시간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조세, 복지, 가계부채, 영세자영업자, 양극화 등 노동자의 생존이 달려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이 정부의 대응은 점점 더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노동정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시간은 불현듯 다가오게 될 것이다. 노동정치세력은 친자본적이며 반노동적인 보수정권의 한계를 보다 분명히 폭로하고, 보수정치세력에게 대리의 권한을 맡기는 한 노동정치의 현실화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요원함을 증명해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관철하는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더 이상 확대가능성이 없는 이전의 정치방침과 활동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대공장 조직노동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변방을 전전해왔던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계급적 조직화를 서둘러야 한다. 노동계급의 문제가 사회모순의 근본문제임을 환기시켜야 하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노동정치의 대의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노동정치만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양상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야 한다. 대중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의 제시와 신뢰의 확보를 통해 중도보수집권세력과는 확연히 분리정립되는 노동정치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더불어 노동정치를 왜곡해왔던 불필요한 대립구조를 청산하고, 노동정치의 대의를 공유하는 제 세력의 연대연합을 통해 세력의 확대를 도모해야 하며, 노동자의 자생적이며 자주적 활동을 통한 지역정치의 복원을 도모해야 한다.
냉혹한 평가와 면밀한 전망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방선거 이후 보수정당 간 이합집산은 가속도를 낼 것이다. 형식상의 다당제 체제는 종식되고 명실공히 양당제 체제로 회귀할 것은 분명하다. 거대 보수양당이 정치를 분점하는 과정에서 노동정치의 위상은 더욱 곤궁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보수양당체제의 구축은 비로소 본격적인 보수 대 진보의 정치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대중들로부터 역량을 인정받으면서 보수정치와 대별되는 노동정치 고유의 비전을 제출하게 될 때 지금의 정치구조는 진일보를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지난 시기 노동정치의 한계와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평가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노동정치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각성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노동정치의 분열과 반목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이며, 그 양상과 결과가 무엇이었고, 현재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충분히 평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청산의 과제와 계승할 유산을 구분하고, 조직적, 구조적 및 인적 쇄신을 수행하면서 노동정치를 지향하는 제 세력의 연대연합의 조건을 창출해야 한다. 또한 보수정치세력의 재편과 기득권 강화공세에 맞서 노동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실천경로와 전망이 대중들에게 제출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이 전열을 정비하고 새로운 시대의 노동정치를 실행해야 할 노동정치세력에게 부여되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빠른 시간 안에 노동정치를 고민하는 제 세력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는 시간을 마련하자.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조직을 망라하고, 노동정치를 고민하는 모든 세력들이 모여 각자의 이해를 제시하고 차이는 무엇이며 동질성은 무엇인지를 확인하자. 노동정치연구소도 일정한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겠다.
출발을 미루면서 시간을 소모하는 동안 노동정치는 보수정치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결연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