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법이라는 법이 있다. 이 법에 의하면 어느 곳에서 살든지, 그곳이 자신의 거주지라면 의무적으로 주소지 등록을 해야 한다. 주소지 등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법으로 규정해놓은 것이 바로 주민등록법이다. 주소지를 등록해놓음으로써 우리는 국가로 하여금 각종 행정적 편의를 제공하도록 요구할 수 있게 된다.
현행 주민등록법은 주소지를 옮긴 신고자가 직접 해당 관공서를 찾아 등록을 해야 하는 신고주의원칙에 따른다. 30일 이상 거주를 목적으로 주소를 옮기게 되면 신고자가 직접 등록을 한다. 이 원칙에 따라 만일 신고자가 주소지를 옮기게 되거나, 더 이상 해당 주소지에 적을 두지 않아야 할 일이 생기게 되면 정정이나 말소의 신고도 직접 해야 한다. 들어간다고 신고하는 사람이 나간다고 신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본인 이외에도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장, 즉 시장·군수·구청장은 거주에 관한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해당되는 사람이 거기 살지 않고 있음을 직권으로 선언하고 주민등록을 말소하거나 거주불명상태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시군구청장이 직권으로 말소와 거주불명등록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첫째, 주민등록을 정해진 기간 안에 하지 않았을 때, 둘째, 신고해야 할 사항을 부실하게 신고했을 때, 셋째, 신고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인정될 때이다.
주민등록이 말소되거나 거주불명등록이 될 경우 해당 본인에게 발생하는 피해가 막심하다. 주민등록이 말소된다, 또는 거주불명등록이 되었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도 아니기에 죽은 사람에게 보장되는 권리 역시 보장되지 않는다. 아예 없는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체의 무엇은 적용의 여지가 없다. 공식적으로는 취업도 할 수 없고, 병원도 갈 수 없으며, 학교도 갈 수 없고, 결혼도 할 수 없다. 장부상 딸린 식구들이 있을 경우 가족구성원 모두가 똑같은 처지로 몰리게 된다.
1997년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제난이 몰아쳤을 때, 도처에 주민등록 말소자들이 넘쳐났다. 대부분의 경우 채권자가 채무추심을 하던 중에 시군구에 채무자의 주소지 거주확인을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빚을 피해 몸을 숨긴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주민등록 말소자가 되었다. 채권자 입장에서야 추심사무를 보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이익을 본다지만, 공공기관이 사적인 금융거래관계에 끼어들어가 채권자의 일방적 이익을 보장하는 행위를 하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행정청의 행정처분으로 말미암아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은 취업이 불가능하여 빚을 갚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더더욱 빚을 피해 주민등록을 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학교에 다녀야 할 자녀들이 학교에 못 가는 등 이들의 가족들도 큰 피해를 봤다. 이런 일들이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느냐 하면 그게 또 그렇질 않다.
여기 한 청년이 있다. 서울 성동구 행당동 작은 방에서 의상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며 열심히 살아가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살던 곳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되었고, 어렵게 이주를 준비하던 중 강제로 철거를 당했다. 청년의 바람은 아주 단순했다. 이주를 준비하기 위해 딱 한 달의 시간만 더 달라는 것이었다. 이 소박한 바람은 용역깡패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삶의 공간이었던 작은 방은 강제 철거를 당했고, 급기야 이 청년은 주민등록을 말소당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이희성, 지금 살고있는 곳은 마포의 경의선 공유지다.(이희성씨의 사연에 대해서는, 당시 행당 6구역 철거대상자들의 이야기 http://www.vop.co.kr/A00000882282.html, 이희성씨의 사연을 담은 브런치 기사 https://brunch.co.kr/@nothingcity/8, 그리고 이희성씨 본인의 페이스북 www.facebook.com/heesung.lee.0428 참조)
이희성씨의 주민등록은 성동구가 말소시켰다. 주민등록말소사유에 대해서 성동구는 해당 구역의 지번이 소멸했고 실 거주가 가능한 건물이 사라졌으므로 그곳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전에 이곳에서 살던 주민은 새로운 주소를 관할 구청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희성씨의 기존 주소지는 이미 철거되었고, 철거 후에 따로 등록한 주소지가 없으므로 주민등록을 말소했다고 설명한다. 얼핏 보면 구청의 소명에 일리가 있고, 따라서 이희성씨의 주민등록말소는 적법한 행정처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성동구청의 행위는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주민등록법상 주민등록의 신고과정과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구청장은 신고의무자에게 사실대로 다시 신고하라고 알려주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알릴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공고를 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신고의무자가 자신이 구청에 가서 뭔가 해야 한다는 사정을 인식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도록 법은 규정해놓았다. 이 과정을 거쳤는데도 신고가 없으면 말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희성씨는 주민등록 말소를 당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희성씨는 관할 구청으로부터 신고사항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통보받거나 신고사항을 수정할 것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희성씨가 담당 공무원과 상담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관할 구청은 그저 주민등록법에 규정된 절차를 무시한 채 이희성씨가 살던 집이 철거가 되었고, 철거가 되었으니 주소지는 없어졌고, 이희성씨가 이후 다른 주소지로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과정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주민등록을 말소했다.
이렇게 되니 이희성씨는 취업도 할 수 없고, 기타 사회생활을 제대로 꾸려나갈 방도가 없어졌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가 없다. 돈을 벌 수 있어야 보증금이라도 마련해 셋방에라도 들어갈 텐데 주민등록말소자는 취업과정에서 본인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이희성씨는 주민등록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관공서에 물었다. 하지만 관공서의 답은 이희성씨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어딘가 주소지를 정하고 등록하면 된다는 것이다. 강제철거를 당해 갈 곳이 없어진 사람에게 일단 갈 곳을 마련하고 얘기하자는 건 앞뒤가 없어도 이만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철거를 강행하던 와중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구청은 자신들에게 전혀 책임이 없음을 강변한다. 시공사와 재개발조합 간의 일에 관공서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성동구청의 답이다. 물론 이러한 답변 역시 재개발승인 등 관공서가 개입하는 절차를 검토해보면 무책임한 변명이지만, 현행 법제도가 엉망인 상태에서 이들의 변명을 십분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철거 후 주민의 주민등록관련업무를 편의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주민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희성씨는 여전히 주민등록이 없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생활이 3년을 넘기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길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 이희성씨의 사연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상징이다. 청년문제, 실업문제, 주거문제, 인권문제 일체가 중첩되어 이희성씨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주민등록말소는 이희성씨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고통으로 다가가고 있다.
주민등록을 새로 만드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 곳이나 주소지를 정하고 해당 주소지의 관할 관청에 가서 신고만 하면 끝난다. 이토록 간단한 일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혹은 힘들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리라. 국가에 의해 존재자체가 지워져버렸다는 충격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성실히 살아왔던 사회구성원이 졸지에 폐기처분되면서 짓밟힌 자존감은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헌법에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는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딱 하나다.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이 필요할 때 그 옆에 있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간단한 공식이 지켜지는 국가가 민주공화국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흔하고, 흔하다 못해 당연지사처럼 여겨진다. 각자도생이 생존의 방식이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뭘 그리 당연한 말씀을” 수준에서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사라지고, 그것도 모자라 한 사람의 존재를 말소해버리고,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 이건 국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이런 국가의 존재이유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