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정치·사람 집행위원장 김태식 인터뷰

노동·정치·사람(이하 노정사): 공식질문입니다. 자기소개를 해주시죠.

김태식(이하 김): 현재 노동·정치·사람의 집행위원장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대학을 잠깐 다니다 6월항쟁이 끝나자마자 인연이 닿아 울산에 가서 용접공으로 현장에 들어갔어요. 지금 표현으로 하면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가 마침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조직되던 시기였어요. 아주 그냥 폭풍의 중심에서 대투쟁을 겪은 거죠. 그 과정에서 내가 특정하게 어떤 참여를 했다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제일 중요한 건 눈으로 봤다는 거죠. 그 시절에 현장에서 그 과정들을 직접 보았고, 느꼈고, 또 승리했다는 그 기억이 굉장히 크게 남았어요. 그래서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아직까지도 떠나지 못하고 노동운동 현장 내에 있어요.

노정사: 정당 활동도 오래하셨지요.

김: 민주노동당 창당 때 당원가입을 하고 내내 당원으로 지냈어요. 뭐, 이름이 몇 차례 바뀌었죠.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내내 머물렀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십여 년 넘는 시간 동안 진보정당 활동을 하게 됐어요. 작년에 탈당을 하게 됐는데, 탈당계를 내고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 절망감을 진짜 많이 느꼈어요. 과연 노동정치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나가서 이런 것을 예비하고 만들 수 있을까. 마음을 새로 준비해야겠다면서 탈당은 했지만, 탈당계 내는 날 누구에게도 얘기 못 하고 술 한 잔 먹고 울었어요. 억울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해. 내가 이러자고 그 세월을 그렇게 보냈나. 민주노동당 당원이 된 뒤에 노동당 당원으로 있는 순간까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민주노총 그 절박한 곳에서 상근하며 말도 안 되는 상근비 받으면서도 아주 어려울 때를 제외하고는 당비를 꼬박꼬박 냈어요. 그리고 또 잠깐 국가에서 주는 밥 먹으러 갔을 때 빼고는(웃음).

노정사: 노동·정치·사람의 전신인 노동정치연구소 창립 때부터 함께하셨지요?

김: 그 당시에는 사실 탈당을 고민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민주노동당 때도 그렇고, 노동당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노동정치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어요. 무상교육이나 무상의료처럼 지역의 일반 민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적 슬로건이나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내용을 만들어갔는데, 오히려 노동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하다가는 정말 노동당이란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가 되겠다 싶었어요. 우리가 노동당 내에서 한 정파로 활동했으니까, 노동 쪽과 뭔가 소통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이걸 두고 ‘노동정치 복원’이라고 얘기하기에도 좀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민주노동당 때부터 그때까지 제대로 된 노동정치가 있었느냐고 하면, 사실은 명확한 상조차도 잡지 못했던 세월이었기 때문에. 가장 원점으로 돌아가서 노동정치란 무엇이냐, 노동자들과 함께 내고 만들어 나가는 정치는 어떤 틀을 갖추어야 하느냐라는 근본적인 고민 속에서 연구소를 기획했어요. 여러 동지들과 함께 기획을 해서 노동정치연구소(이하 연구소)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지난번 인터뷰를 보면 대표님은 날짜까지 기억하시던데 저는 가물가물해요(웃음). 조금 무리하게 연락을 다 드렸는데, 그날 찍은 사진을 보면 많이 모였구나 싶어요. 아무튼 그때 모인 동지들에게 이러이러한 취지로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만들고자 하니 같이 힘을 보태주십시오 하고 연구소를 만드는 데 1년여를 보냈죠. 창립하고 출범하는 과정에 많은 동지들이 애를 썼어요. 제가 초반에 거의 독불장군처럼 무리하게 사무실부터 얻었는데, 유지하기 힘든 상황까지 오기도 하고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근데 저는 이렇게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지 않고는 사실상 일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공간을 만들고 공간을 유지하는 비용 하나하나는 만들면서 채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조직화의 과정이고, 그 과정에 충실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게 조직에 대한 제 나름의 지론이에요. 아무튼 많이 힘들었어요, 1년 동안. 그래서 처음에 준비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잠깐 물러나기도 했어요. 개인적인 일로 바쁘기도 했는데, 사실은 연구소가 살짝 보기 싫었어요. 고작 1년 준비하고 지치냐 하겠지만, 처음 추진위 때부터 치면 한 2년 넘게 이거 하나 만들어보자고 달려온 거거든요. 잠깐 한숨 돌릴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한편으론 내가 운영위원으로서 너무 독선적으로 판단하고 주장해서 끌고 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대부분은 제가 고집을 많이 부려서인데, 다른 운영위원들과 대립도 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사업을 기획해도 집행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예요. 내가 한발 살짝 벗어나서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 길지는 않았고, 여러 사정상 몇 개월 만에 돌아오게는 됐지만요.

노정사: 연구소가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기엔 여러모로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본격적으로 창립을 하며 연구소가 사회단체로 조직의 형태를 바꾸었는데요, 밖에서 봤을 때는 간판만 바꾼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조직의 활동 내용이나 목표 이런 것들이 새롭게 설정된 것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세요.

김: 집행위원이 아직 공식적으로는 구성이 안 돼서 저만 집행위원장으로 홀로 있는데, 제가 구성하고 있는 집행위원들과 현재 수임 의사를 밝힌 집행위원들은 사실 앞으로 꾸릴 소모임들의 주체들이에요. 실질적으로 일하는 동지들이 집행위원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예전처럼 어떤 사업을 집행위원회의에서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각 모임이 실제 진행하는 사업 내용을 가지고 와서 논의를 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연구소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실제로 다양한 사업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웹진팀과 연계해서 그런 활동 사항들을 회원들에게 끊임없이 알리기도 할 거고요. 좀 더 드러나게 달라지는 부분은 집행위원 중에 노동담당 집행위원을 두는 거예요. 우리 단체가 가진 힘이 적어도 우리의 뜻을 전달하고 그 싸움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방법은 대책위에 들어가는 거예요. 투쟁하는 사업장의 대책위에 들어가서 회의체계에 들어가 같이 논의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집행위원 중 한 분이 그것을 전담하게 하고, 그 내용을 전해주시면 단체 내부에서 공유하고 내용을 만들어가려 해요. 사실 이게 가장 크게 바뀌는 부분입니다. 확실하게 현장과 함께 가겠다. 동떨어져서 입으로만 떠드는 노동정치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보겠다는 거예요. 정말 싸우는 현장 안에 가서 보고, 부대끼고. 우리 회원 몇 명 되지도 않은데 대부분 직장인이잖아요. ‘연대해주십시오, 갑시다!’ 하는 거보단 ‘여기 물품 전달해야 하니까 돈 주세요’ 하는 게 더 빠르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투쟁하는 사업장의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알 수가 없어요. 돈 한 몇십만 원 만들어서 투쟁물품 전달하고 투쟁기금 전달하는 거? 거기까지예요. 그건 단체가 할 일이 아니에요.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투쟁하는 게 정말 왜 어려운지, 그래서 노동정치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보자는 거죠. 이걸 통해서 참 많은 게 바뀔 거예요. 한 다리 건너서 고민을 듣거나 일단은 대중에게 선전하고 알려내기 위한 홍보지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고민을 가감 없이 우리가 받는 건 완전히 다르지요.

돈 한 몇십만 원 만들어서 투쟁물품 전달하고 투쟁기금 전달하는 거?  그건 단체가 할 일이 아니에요.

노정사: 연구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시는 동안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는데, 그럼에도 다시 노정사의 집행위원장을 맡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 노정사의 창립을 준비하는 동안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게 김혜경, 이덕우 두 분 대표님께서 나서주신 거였어요. 거기다 김혜경 대표님께서 “이 일에 내 운동의 마지막을 걸겠다”라고 하시는데 감히 도망을 가거나 여기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웃음). 전임 집행위원장인 박지영 동지를 비롯하여 저 역시 초동주체라서 그럴 수도 없었고요. 애초에 연구소를 기획했고, 동지들이 이 만큼 관리해왔으니, 더 내실 있게 채우고 만드는 건 김태식이가 동지들이랑 같이 해라 하시는데 ‘No’를 못 하겠는 거죠. “알았습니다” 했죠(웃음). 솔직하게 얘기하면 창립 준비를 하면서 힘든 부분은 있었어요. 사실 집행위원장은 이러이러한 기획들을 받아서 집행하고 관리를 해주는 게 보통인데, 저는 어쩌다 보니까 사업기획부터 다 하게 된 거예요. 노래하고 박수치고를 다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과부하가 굉장해요.

노정사: 준비를 열심히 해오셨는데요, 노정사의 첫 집행위원장으로서 임기 동안의 목표가 있으시다면요?

김: 창립총회 때 제출한 사업안에도 들어가 있는 내용인데요, 조직의 성격이 연구소에서 사회단체로 바뀐 만큼 각 부문별 소모임을 다양하게 만들어 우리 회원들이 참여하고 만들어갈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이 사업은 초반에 기획할 때부터 집중해서 신경을 많이 썼어요. 총회 사업안을 만들 때도 그렇고, 실무주체가 될 수 있는 동지들과 사전에 서너 차례 이상 만나 얘기를 나누며 함께 기획했어요. 정말 세세하게 계획을 짰는데, 그 이유는 우리 회원들에게 미안해서예요. 우리 회원들이 그동안 1년여를 기다려줬는데, 1년이면 기본적으로 12만원이란 돈을 주셨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은 2만원어치도 못 돌려드린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콘텐츠들을 개발해 동지들에게 돌려드리고 싶어요. 또 적어도 내가 속한 이 단체가 내 관심 분야에서도 이러이러한 일들을 하는구나 명확하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최선을 다해서 만들 생각입니다. 우리 모 동지께서 항상 얘기하는 말처럼 ‘상도의상’ 12만원어치 다는 못 드려도 최소 6할은 돌려드리고 싶어요(웃음). 그래야 이 조직이 점점 더 앞으로 갈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상반기 목표는 이렇고, 일단 최우선 목표는 노동절 전까지 회원 200명을 채우는 거예요. 지금은 회원 수가 좀 어정쩡해요. 173명인가. 여기 스물 몇 명 더해서 200명을 딱 채워보고 싶어요.

일단 최우선 목표는 노동절 전까지 회원 200명을 채우는 거예요.

노정사: 소모임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김: 일단 연구소 때부터 있었던 ‘뿌리내리기’라는 소모임이 있어요. 뿌리내리기는 지역정치와 관련된 현안이나 자기 지역에 있는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고민해서 틀을 만들어가는 모임이에요. 지역 현안에 대한 대응부터 지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진보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까지 함께 논의해요. 그리고 성소수자 모임이 있어요. 성소수자이면서 노동자인 동지들을 인터뷰해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소수자의 삶을 조명하고 서로의 이해를 넓혀가고자 해요. 매월 두세 건의 인터뷰를 진행하려 하는데, 이미 인터뷰를 한 분도 있어요. 그리고 청년학생위원회가 있는데, 같은 무게로 세상을 바라보긴 하지만 사고가 없는 한 적어도 우리보다는 더 오래 살 수 있는 동지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의 한걸음이 더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소모임이라고 생각했어요. 가능하면 학습모임도 만들고 싶어요. 그 안에서의 학습내용을 회원들에게 공유하기도 하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스터디모임을 자체적으로 꾸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여하튼 공부모임도 만들고 토론회도 만들어내서 우리 회원들에게 보여주고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소모임이라고 말하기엔 좀 애매한 부분인데, 지역에서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그 지역의 모임을 만들어보려 해요. 연구소 때에도 전남, 경남, 이렇게 지부처럼 모임을 만들어보자는 고민을 했었거든요. 그 고민을 이어서 일단은 지부건설모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걸 소모임에 넣어도 될지는 모르겠어요. 이건 사실 집행위 내에 조직단위로 묶여야 할 텐데. 어쨌든 우리가 재밌는 점이 지부 건설에 대한 조건과 약정이 없어요. 1인 지부도 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진행하다 보면 연내에 한두 곳 정도는 노정사 지부를 건설할 수 있겠다 싶어요.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에요. 집행위원장으로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하고는 있지만, 인터뷰 시점이 집행위 구성이 되기 전이라서 제가 지금 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후 집행위 회의를 통해서 확인하고 결정이 되어야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이에요. 논의해보면 사업 방향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 같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다듬어서 하나하나 월별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노정사: 연구소를 만들 때 원래 목표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노동법원 설립과 노동법 학교 교육, 노동법 사회교육. 이제 연구소가 아니라고 이 사업들을 접는 건 아닐 텐데요, 이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김: 숙제죠, 못 다 푼 숙제. 하지만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인 건 분명해요. 이것이 숙제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역량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무리한 목표를 잡았기 때문이에요. 일단 그거를 풀 수 있는 실력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에요. 지금 산수를 배우는 판인데 수학을 풀라고 하면 안 되니까. 더하기 빼기 곱하기 배우는데 2차 방정식 풀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사업들이 우리에겐 2차 방정식이에요. 숙제를 하는 방식은 참 다양해요. 내가 못 풀면 남한테 도움받을 수도 있죠. 우리 외에도 그 숙제를 안고 고민하는 단체들이 있을 거예요. 그들과 연대해서 같이 길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꼭 우리 손으로 풀어야 한다? 그건 아니에요. 어쨌든 저는 올해 우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모임들의 기초를 닦고 조직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활동의 영역들을 넓혀가다 보면 우리가 못 다 푼 숙제를 고민하는 단위도 보이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안 보이면 찾아봐야겠죠. 찾아서 우리 숙제를 함께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죠. 지금 당장은 그 숙제 못 푼다고 생각해요. 더 솔직히 얘기하면 풀 생각도 없어요. 그럴 역량이 없어요. 거기에 손댔다간 이것저것 가장 기본 주춧돌이 될 수 있는 부분들도 부실공사가 돼버릴 거 같아요.

노정사: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김: 이번에 창립을 준비하며 제일 가슴 아팠던 부분이 장천익 선배예요. 처음 추진위원으로도 같이 참여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셨는데….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공식적으로 창립하는 순간에 함께 있었으면 굉장히 기뻤을 텐데… 천익 선배가 계속 가슴 한 귀퉁이에 남아요. 창립하고 혼자 형이 쉬고 있는 데에 다녀왔어요. 뭐 딱히 어디 가서 얘기하기도 그렇고, 그냥 형한테 가서 “창립했다”고 말했어요. 형 많이 애써준 덕분에 어쨌든 이렇게 됐다고, 형 없는 시간이지만 창립을 했다고, 고마웠다고. 그렇게 만나고 왔는데, 기분이 참 그래요. 이렇게 저렇게 같이 애써주신 분들이 참 많았는데 좀 더 두루두루 살펴보았음 좋았을 텐데…. 우리 회원들, 특히 40~50대 회원들은 건강을 좀 잘 돌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가 좀 길게 오래 볼 거 아니냐. 우리가 목표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라도.

 

정리 | 정정은 노동·정치·사람 웹진팀
사진 | 박성훈 노동·정치·사람 웹진팀

Leave a Reply